인간은 완벽한 사랑을 행할 수 있을까. 사랑 그 자체, 100%의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아내는 남편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반대로 남편은 아내를 100% 사랑할 수 있을까. 대답은 ‘불가능하다’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남편 혹은 아내를 위해 100%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교만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랑을 한다고 해도 티끌만한 사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티끌 같은 사랑 실천 노력을 보고, 그 나머지를 채워주신다. 우리가 간혹 완전한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분께서 부족한 나머지를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사랑을 부풀리고, 완전하게 채워주시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한 인간이 소우주로서 베푸는 사랑이 10% 라면 대우주를 섭리하시며 온 인류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90% 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베푸는 사랑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종 착각에 빠진다. 작은 사랑 한 번 베풀고, 큰 보답을 받으려 한다.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데 형편없는 보답이 돌아온다며 분노한다. 우리가 부모님께 해드린 것이 과연 무엇인가. 각자의 아내와 남편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만약 해준 것이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을 해 주었을 뿐이다.
겸손해져야 한다. 여기서 겸손해진다는 것은 ‘열려 있음’, 즉 개방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열려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닫혀 있는 사람, 즉 폐쇄적인 사람은 늘 자기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늘 불만과 불평이 가득해진다. 내 생각이 옳고, 나만 손해 보며 사는 것 같고, 나만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겸손할 때 우리는 하느님 은총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나의 작은 사랑을 완벽하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다. 열려있는 이에게 하느님은 참으로 큰 은총으로 다가온다. 심지어는 내가 실천하는 모든 사랑이 그 자체로 은총이다.
어떤 이들은 사회복지시설에 큰 액수의 기부금을 내고, 많은 봉사활동을 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만족감에 뿌듯해 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미 하느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았기 때문에 복지시설에 기부금을 내고, 봉사활동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열려있으면 겸손해질 수 있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것이 바로 은총이다. 그 은총 속에서 사랑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마음이 평화롭다면 그 때 내 안에 사랑의 하느님이 들어오신 것이다. 열려있고, 겸손한 마음 안에 평화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쥐어짜듯이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신앙생활도 힘들어진다. 하느님께 다가가기 힘들다. 주위에는 20년 혹은 3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도 늘 죄의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많은 수도자와 성직자, 평신도들이 성체 앞에 앉아서 스스로를 성찰할 때 대부분 이러한 내성적 성찰에 머문다. 스스로의 잘못된 점에 대해 반성만 한다. 하느님께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성하고, 동료와 이웃에게 잘못한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스스로의 인격적 결함에 대해 반성한다. 그리고 끝없이 걱정한다. 이러한 성찰은 분석적이고 공격적이며 자학적이다. 우리는 초월적 성찰을 해야 한다. 초월적 성찰은 통합적이고 온유하다.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한다. 사랑을 실천할 때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현재 느끼는 나의 감정에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그 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 조금 어려운 표현을 빌리자면, 초월적 자아 현존(transcendental self presence)을 느껴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내안에 함께 현존하고 계심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그분께서 원하는 기도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포함한 모든 실재(實在)에 전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전체’를 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 전체를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 겸손해야 한다. 열려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초월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신비에 다가갈 수 있고, 그 신비를 비추어낼 수 있다.
-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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