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이른 봄부터 피정의 집 뜰 안에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지를 쳐 주어야 새순에서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가지치기 전에는 묵은 나무껍질을 벗겨 줍니다. 하얀 포도나무의 속살이 꽃샘추위에 안쓰럽지만 더 예쁜 싹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아픔을 참아야 하는 고통도 따르는 법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먹는 모든 농산물이 그렇듯이 포도 역시 우리 입에 들어가기까지는 결코 녹록치 않은 수고와 땀과 아픔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먼저 껍질의 벗기움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속내를 겸손되이 드러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감추임이 없는 진실된 삶을 살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의 삶이 오늘의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은 포도나무에서 배울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입니다.
깨끗이 껍질을 벗겨낸 포도나무에 이번엔 거름을 줍니다. 거름은 모두 짐승의 배설물입니다. 냄새가 코를 찔러도 참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 냄새를 고향의 향취라고, 시골다운 맛이라고 위안해 보기도 합니다. 열매는 그 더러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감히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남들이 더럽다는 것을 만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기의 똥오줌이 묻은 기저귀를 손으로 만져 갈아 끼울 수 있어야 하고, 설거지가 끝난 뒤, 더럽게 느끼는 오물을 집어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변기가 막혔을 때, 그 역겨운 냄새와 더러움을 참고 뚫을 수 있어야 어른인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거름의 더러움을 귀한 양분으로 바꾸어 포도 열매에 공급합니다.
이제 포도나무는 가지치기의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 없는 곁가지들을 너무 많이 달고 살았습니다. 그것을 잘라내면 당장은 불편함과 아픔이 따르겠지만, 충실한 미래의 열매를 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작은 불편함과 수고로움,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곁가지를 그냥 두었을 경우 열매가 실하게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맺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포도나무는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온 몸으로 견디며 가지와 열매를 지킵니다. 포도나무의 일생은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삶을 너무도 닮았습니다.
열매 맺는 가지
진정 포도 열매가 우리 입까지 오는 데에는 이만저만 잔손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가지들은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혹은 무거워지는 포도 열매로 인하여 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줄기에 붙어 있도록 철사줄에 일일이 묶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붙어 있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어디 포도나무와 온갖 과일나무뿐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인간사의 모든 관계 역시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부부 사이도 붙어 있지 못하면 갈라서게 됩니다. 사이가 좋아야, 사랑해야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관계가 원수 지경이 되면 마주 보는 자체가 지옥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붙어 있을 때, 행복의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부족하다 하여도 그 부모를 업신여기고 떨어져나간 자식치고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가족이건 직장이건 그 모든 관계에 있어 지속적인 붙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계셔야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혼율을 가진 불명예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 부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살아 보려는 노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 부부 사이에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계시어 갈라지지 않게 끌어당기시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포도를 먹을 때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열매가 꽉 찬 것보다는 못생겼더라도 듬성듬성 맺혀 있는 포도가 훨씬 맛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도 멋있고 잘난 사람보다는 못나고 부족한 사람들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도 당신 자신을 “바보야”라고 하셨는지 모릅니다. 우직한 바보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바보들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