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개인적 차원의 영성 문제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나눴다. 앞에서 많이 설명했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그 골자는 하느님과의 ‘합치’(congeniality), 주어진 삶 상황 안에서의 ‘융화’(compatibility),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연민’(compassion), 그리고 이를 통한 인간 ‘역량’(competence)의 발휘다. 이 네 가지를 통해 우리는 조화로운 삶(공명·Consonance)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공명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社會的 動物·Social animal)이기 때문이다. 북한문제는 개개인으로 봤을 때는 별다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북한 사람이 굶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 경제 문제는 실제로 나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바로 나의 실직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다.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선택한 국회의원 한명으로 인해 내 직장, 내 가족이 휘청거릴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은 사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인도에서 오랜 기간 생존하는 사람이라도 무인도에 가기 전 사회와 학교에서 배운 생존의 법칙 때문에 살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개인’들을 만난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모든 개인들은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개인이다. 나는 개인을 만나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주고, 나를 만난 개인은 또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내가 변화시킨 한 개인이 가정으로 돌아가 행복한 가정을 일굴 수도 있다. 다른 개인에 의해 변화 받은 내가 직장과 가정, 국가를 성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실현시켜 나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은 사회의 자식이며, 사회공동체의 형성자로서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사회의 어버이이기도 하며, 사회적인 것임과 동시에 또한 사회의 형성자(形成者)로서 참여한다. 사회는 어디까지나 개인을 기초로 성립되는 동시에 개인은 그 사회를 발달시켜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개개인의 삶 안에서 형성하는 신적 신비를 구현해낸다면, 이는 동시에 사회 안에서 그 신비를 비추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영성을 사회에 비추어내지 못한다면 그 영성은 영성이 아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영성적 삶은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제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공명의 삶으로서의 성향들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를 알아보자.
개인적인 하느님과의 ‘합치’(congeniality)에 대한 관심은 ‘사회 정의’(social justice)를 낳는다. 인간 개개인은 합치적 삶을 통해 개인적 차원 혹은 국가적 차원, 국제적 차원에서 어떻게 정의의 면모를 비추어 내도록 불리웠는지 성찰해야 한다. 또한 개인은 이웃과 사회에 대해 불신과 비판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사회적 차원에 대해 정의로운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사회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전체적인 면에서 분별하고 있는가를 먼저 식별해야 한다.
또 ‘융화’(compatibility)의 삶은 ‘사회적 평화’(social peace)라는 성향을 포괄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로서 이 사회가 비폭력적 대화를 할 수 있는 표지가 되도록 불림 받았다.
또한 ‘연민’(compassion)은 ‘사회적 자비’(social mercy)라는 성향을 포괄한다. 자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돌봄과 관심, 친절, 용서를 개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사회 전체까지 확장시켜 나가도록 한다. 기근, 학살, 범죄, 자유의 상실, 비인간적 행위 등은 인간 개개인의 연민의 영성이 얼마나 넓게 퍼져 나가야 하는지를 드러내준다. 이는 불교의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가는 차원의 자비라고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인간 개개인의 ‘역량’(competence)은 책임있고 효력있는 ‘사회적 활동’(social action)을 낳는다. 이 성향은 인간 개개인이 사회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하느님이 마련하신 사회적 정의와 평화, 자비라는 요청들을 이행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 안에서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최대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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