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에 ‘합치’(congeniality)하는 개인적 영성의 삶을 사회에 비추어 낼 때, 이 합치는‘사회 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투신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인간 개개인은 하느님과의 합치하는 삶을 통해 개인적 차원 혹은 국가적 차원, 국제적 차원에서 어떻게 정의의 면모를 비추어 내도록 불리웠는지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라면 이웃과 사회에 대해 불신과 비판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사회적 차원에 대해 정의로운 삶을 살아 왔는가’ 그리고 ‘사회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전체적인 면에서 분별하고 있는가’를 먼저 식별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합치 없는 사회정의의 외침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여기서 사회정의라고 할 때, 반드시 과거의 유신헌법에 저항하고, 민주화 투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의 의견과 다른 사람은 모두 나쁜 인간” 이라고 욕하는 것이 사회정의는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상황’들이 벌어진다. 문제는 이 상황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결국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입장에서 내리는 상황 판단은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느님 앞에선 형성의 장 전체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데 있어 나도 부족하고, 너도 부족하다. 우리 모두가 부족한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정의는 ‘나’가 중심이 되어선 안된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정의에 하느님과의 합치가 중요한 이유다.
소위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은 정의롭고,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혹은 설득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려 한다. 물론 옳을 수 있다.
하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자라고 해서 전적으로 정의롭고, 기업가라고 해서 전적으로 나쁜 착취계급이 아니다. 재벌가 청소년들이 모두 나쁘고, 가난하고 어렵게 성장하는 청소년들이 모두 선하고 착한 것만은 아니다. 나만 정의롭고 상대방은 불의하다는 식의 접근으로는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자신이 바로서야 한다. 자신이 바로 서면 겸손히 낮추게 된다. 먼저 하느님 앞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늘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합치되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했다. 그 결과가 당시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으로 나타난다.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나무라는 그 힘은 단순한 정의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발로가 아닌 하느님과의 합치 속에서 더 큰 위력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성부 아버지와 합치된 모습으로, 일치된 모습으로, 기도하는 모습으로, 영적인 모습으로 사회를 대면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잡으러온 로마 군인들을 향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대할 수 있었다. 예수는 저항하되, 평화적 방법을 사용했다. 가만히 있을 때도, 평화적 모습으로 머문다. 이 같은 모습은 인도의 간디에서도 발견된다.
사회 정의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접근해야 한다. 자녀가 어긋날 때 회초리를 들 수도 있고, 호되게 꾸지람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회초리와 꾸지람 속에는 사랑이 있다. 사회를 연민의 눈으로 보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를 세워야 한다. 나 자신의 울분을 풀어버리려는 태도나, 개인적 사욕이 끼어든 사회정의는 또 다른 불의와 갈등을 낳을 수 있다.
하느님과의 합치만이 진정한 사회정의를 낳을 수 있다. 하느님과의 합치를 통한 사회정의가 진정한 사회정의다. 기도를 먼저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지혜로운 분들을 만나서 의견을 들어야 한다.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기 위해 많은 공부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과의 합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긍정적인 응답과 실행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인내해야 한다. 성급해서는 안된다. 유연성을 견지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삶이 필요하다.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연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로 간에 이해하고 용서하는 삶이 필요하다. 또한 상대방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늘 민감해야 한다. 하느님과의 합치가 선행될 때, 그 비추임인 사회정의는 진정한 사회정의가 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이런 사회정의에 목말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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