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차원에서 ‘영성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알고 보면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 사랑의 현현으로 존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 뜻에 합치해야 하고, 융화와 연민, 역량의 성향을 총동원해야 한다. 이는 영성적 삶의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발생한다. 하느님은 나 혼자만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창조했다. 인류를 창조하셨고, 자연을 창조하셨고, 우주를 창조하셨다.
결국 사회적 차원의 영성적 삶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나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까지 함께 포괄한다. 개인적 차원의 수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세상에 직접 내려와 우리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 아버지와 통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초형성하는 신비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함께 호흡했다. 인성을 취하셨기에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만나야 했고, 장애인과 병자 등 소외된 이들과도 만나야 했다. 그런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영성적 삶의 모범으로 다가온다. 그 모범들을 하나 둘 들여다보자.
가톨릭 신자라면 하느님과 합치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모든 노력을 다한다. 성당에 다니고, 가톨릭신문을 읽는 등 신앙적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우리의 신앙적 삶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사회의 정의를 낳는다. 우리들 각자는 개인적인 차원이나 국가적인 차원 혹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정의의 면모를 비추어 내도록 불린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주의 깊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이들이 사회정의를 외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정의로운가. 정의롭다면 어느 정도 정의로운가. 내가 먼저 정의로워져야 한다. 정치인들 중에는 정의로운 ‘척’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상대편을 무조건 악으로 몰아붙인다. 이래서는 싸움 밖에 벌어지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많으면 사회적 정의는 요원해진다.
사회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적 평화 또한 불가능하다. 정의가 바로서지 않는 정치판이 어떻게 평화로워질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융화’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람들이 여기서 그리고 지금 처해있는 상황들 속에서 서로들 사이에서 도달해야 하는 융화라는 근본적인 성향으로부터 비롯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융화는 사회적 평화라고 하는 성향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평화는 인간관계에서 볼 때 사회적 자비의 성향을 낳는다. 모든 인간은 나약함과 한계성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이 부족한 인간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필요한 가치관은 서로간의 자비스러운 마음이다. 즉 개인적 차원에서의 연민이라는 근본적 성향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자비의 성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정의와 평화와 자비의 이 세 가지 성향 모두는 그리스도 인격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격적 삶은 하느님이 당신의 신적인 정의와 평화 그리고 무한한 자비로 우리의 구원이 되도록 그리스도 그분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가 깨닫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인간의 사회적 정의와 평화와 자비의 활동들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요 자매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 한 가족이다. 내 중심으로만 살다보면 언어적, 물리적, 신체적 폭력이 나올 수밖에 없다. 폭력은 하느님 안에 창조된 인간의 그 유일회적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평화를 깨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람은 비폭력을 말한다. 사회에서 무시만 당하고 살았는지, 집에만 들어오면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는 등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들이 적지 않다. 이는 정의로운 사람, 영성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남편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가정을 세우지 못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어떤 남편이 귀가 시간이 자주 늦었다. 이럴 때 아내가 가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상처를 주는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며 바가지를 심하게 긁으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는가. 원래 목적인 정의로운 가정은 물 건너가기 쉽다. 하느님과 합치하려는 인간 고유의 성향을 잘 개발시켜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자비롭게 대하며 또한 정의로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바가지도 예쁘게 긁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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