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재 신비를 세상에 비추어내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쉽지 않다.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방해물 때문이다. 신비를 비추어 내려고 해도 그 노력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 그 큰 걸림돌이 오만 형태(Pride form)다.
이 오만 형태가 ‘현현’(顯現)의 삶을 방해한다. 국어사전에선 ‘현현’은 ‘명백하게 나타나거나 나타냄’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창세 1,26 참조) 하느님을 현현시켜야 한다. 하느님을 명백하게 이 세상에 나타내 보여야 한다. 더 나아가 은총의 도움을 통해 현현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들의 시도는 오만 형태로 인해 방해 받는다.
오만 형태란 쉽게 말하면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교회가 원죄라고 말하는 것도 ‘내 뜻대로 하려는 성향’ 즉 ‘오만 형태’가 아닐까 싶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스스로의 뜻대로 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오만 형태는 인류 시초부터 있었고, 그것이 역사의 무의식 안에서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오고 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 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두텁다. 우리 각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두터운 무의식에 의해 의식과 초월적 의식의 상당부분이 지배받고 있다. 이는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무의식 층도 상상 외로 두텁다. 우리가 일본과의 축구 혹은 야구경기 때 ‘일본만큼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무의식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 역사 안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오만 형태를 극복하고 걷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오만 형태가 우리를 어그러짐의 땅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오만 형태는 불의와 폭력과 비인간성이 팽배한 땅으로 밀어 넣는다. 오만 형태가 우리를 처참한 상태로 밀어 넣는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현현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오늘 이 시대의 세계 상태에 대한 철저한 관찰을 통해 가능해진다. 세상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그러짐의 땅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 불의와 폭력과 비인간성이 팽배한 땅으로 내쳐지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고 싶지만, 신비를 비추어내고 싶지만 집요하게 밀려드는 장애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 모두가 오만 형태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오만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신비를 비추어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오만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험난한 장애물 경기장이 된다.
더 나아가 오만 형태는 생명과 에너지의 원천으로서 형성의 장 안에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중심에 계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대신에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스스로가 성취해야 하고 행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이웃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고3 자녀에게 서울대학교, 육군사관학교, 경찰대학을 강요하는 것도 바로 오만 형태의 발로다. 일본이 아시아를 해방시키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것도 오만 형태의 발로다. 고3 자녀가 스스로의 형태로 형성해 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일본은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 설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오만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에게 의존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성취해야 하고, 행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집착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의 구세주로 간주하는 유혹에 빠져들 수 있다.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없다고, 세상이 썩었다고, 나만이 옳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의하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투신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구세주 강박관념’(savior complex)이다. 구세주 강박관념은 오만 형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기만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통제하고 조작하고 구원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시도들에 매혹당하면 안 된다. 엉뚱한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선 안 된다. 저 형성하는 신적 신비(하느님)가 바로 우리가 비추어내야 하는 ‘단 하나의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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