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걸어왔다. 이제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프로그램의 마지막 단계인 6단계 ‘은총과 더불어 나아가기’를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정상에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되풀이해서 6단계 프로그램까지 완성시킨다면 우리는 영적 삶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파악하던 인간의 존재양식과 하느님의 섭리 방식에 대해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년 넘게 ▲우리는 누구인가(1단계) ▲마음열기(2단계) ▲삶-생명에 귀 기울이기(3단계) ▲언제나 ‘예!’라고 말하기(4단계) ▲신비를 비추어 내기(5단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나의 육신과정뿐 아니라 마음을 열고, 형성의 장 전체 안에서 삶과 생명에 귀를 기울이고, 영적인 분별을 갖고 하느님 뜻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영성은 일단 내면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신비를 세상에 비추어낼 수 없다면 그 영성은 껍데기일 수밖에 없다. 신비를 세상에 비추어내지 않는 영성은 거짓 영성이다. 영성의 향기를 내지 않는 영성가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작업까지 마쳤다.
다시 묵상해 보자.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묵상을 하다 보면 하느님의 살아있는 엄청난 사랑의 신비에 문득문득 놀라곤 한다. 신비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사랑의 뜨거움이 느껴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하고 말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외양형태(외모의 차원·apparent form), 교류형태(정신적 차원·current form), 핵심형태(영적차원·core form)등 ‘실제적 삶의 형태’(actual life form)가 모두 그리스도의 형태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매일 인간 내면으로부터 주어지는 지침들에 순명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아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삶의 형태로 조율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영성생활이다. 나의 의식차원을, 지난 과거부터 살아왔던 모든 삶을 다 초월적 의식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인간적인 해석을 하고 인간적인 결론을 내리고, 인간적인 대응을 한다. 이것은 육신적 정신적 차원으로서, 이래선 안 된다. 영적인 해석을 하고, 영적인 결론을 내리고, 영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세상 만물이, 오늘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은총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나쁜 기억들도 깨달음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결국에는 은총을 통해서 신비를 비추어 내는 인격들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를 단순히 느끼는 수준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은총을 비추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더불어 나아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1~5단계가 영성적 삶이 과연 무엇인지,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이론적 차원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실천적 차원에서의 이야기다. 구체적으로 은총과 함께 나아가는 차원에 대한 이야기다.
실천이 없는 영성은 허구다. 아무리 기투의 삶(나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형성하는 신적 신비에 온전히 내어던지는 삶)을 산다고 해도, 나 자신이 세상에 은총이 흐르게 하는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껍데기 영성이다.
하지만 여기서 은총과 더불어 나아가기 위한 ‘노력’은 말 그대로 인위적인 ‘노력’이 되어선 안 된다. ‘은총과 더불어 나아간다’는 말은 ‘은총과 더불어 흘러간다’(flow with grace)는 의미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 사명이자 삶의 이유 그 자체다.
이러한 흐름은 ‘변화’다. 그런데 지속적인 변화는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은총 안에서의 삶은 1년 전과 1년 후가 완전히 다르다. 은총과 함께하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어려움에 있다 하더라도 한 달 후에는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은총과 함께 나아갈 때,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은총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 우리는 착한 일을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착한 일을 하는 그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은총을 받은 것이다. 은총은 지속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우리는 그 변화 속에서 은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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