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서한에 대하여
최양업 신부의 두 번째 서한은 첫 번째 서한과 마찬가지로 그의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서한의 발신지는 다르다. 마카오에서 편지를 보낸데 이어 두 번째 편지는 외몽고의 팔가자에서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외몽고의 팔가자는 최양업 신부가 귀국 도중 들러 매스트르 신부 밑에서 신학공부를 계속 한 곳이다.
팔가자에서 1844년 5월 19일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최석우 몬시뇰은 두 번째 서한을 통해 최양업이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한다고 전한다.
▲한 가지는 최양업 신부가 첫 번째 서한을 쓴 마카오를 떠나 요동까지는 왔으나 아직 입국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부님과의 애절한 서한 교환을 못하고 지낸 지 어느덧 3년이나 흘렀습니다. 육신으로는 비록 신부님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나, 마음과 정신으로는 잠시도 신부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중략) 신부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지 얼마 안 돼 저는 저의 조국을 향해 파견됐는데 기대와는 달리 요동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서한을 통해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함께 있다는 것과 입국의 설렘을 안고 조선의 동포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또한 밝혀둔다.
서한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고국의 박해소식에 대해 최양업 신부가 토로하는 자신의 심정이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중략)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했으니 저의 신세는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두 번째 서한은 조국에서 벌어지는 박해에 대해 슬퍼하고 자신의 미숙함에 대해 고뇌하는 사제, 최양업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또 미약한 자신의 지위만 아니라면, 자신의 ‘글’을 통해 이러한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서한’에 대해 적극적인 최 신부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만일 저의 미소한 지위와 능력 부족이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많은 글을 써서 우리 회의 장상들과 지도자들에게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형제 신자들에게 이 사정을 두루 알려드렸을 것입니다.”
기해박해에서 김대건의 부친, 자신의 부모를 위시해 많은 교우들이 순교한 이 박해사실은 김대건이 1842년 말 변문 부근에서 김 방지거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알려진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첫 번째 서한에 이어 두 번째 서한에서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부탁했던 것을 또 한 번 청한다.
“전번 서한에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 나무의 한 조각을 청한 일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것을 장만하신다면 틀림없이 저에게 보내주실 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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