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성(理性)은 참으로 위대하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판단하고, 사유하고, 대화한다. 놀라운 철학적 성찰을 척척 해내는 것도 이성이다. 오늘날 인간이 이처럼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것도 모두 이성의 힘이다. 계몽주의 이후 대부분의 근대 사상가들이 종교를 버리고 이성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심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이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제1, 2차 세계대전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파괴와 살육과 눈물이었다. 그래서 사상가들은 다시 전인적 인성과 신앙에 주목하게 된다. 지금 서구의 그 어느 사상가도 이성에 매몰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사실 이성만 가지고는 인간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볼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등에 대한 해답을 이성은 줄 수 없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이성이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인간 자아의 깊숙한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은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장 깊은 곳을 볼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은총 안에서만이 나와 이웃, 자연, 세계의 진정한 내부를 볼 수 있고, 전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은총을 통해서 나는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초월적 형성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실제로 은총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가 가진 총체적인 형성적 능력을 극대화한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 형태를 가려버리는 반형성적인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이를 떨쳐버릴 수 있도록 하는데 큰 힘이 된다. 은총을 거부하는, 인간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형태(pride form)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오만형태는 거짓된, 모조의, 허위의 형태(counterfeit form)다. 인간이 자기 교만과 오만에 빠져, 잘못된 계산을 하는 삶의 형태가 바로 거짓된 형태(counterfeit form)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생명의 대립형태에 빠져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형태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은총이다. 우리는 손해 보지 않으려 계속해 주판알을 튕기며 계산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요즘 사람치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고 정당화하려 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인간 개개인의 판단과 생각, 욕심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거짓된 계산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계산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내 계산 방법만 따른다.
하느님의 은총에 나 자신을 종속시키지 않는 한 오만 형태가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는 반형성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세상을 형성하시고 형성되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미리 형성의 씨를 뿌려 놓으셨는데, 그 씨앗이 발아되는 것을 막는 반형성적인 것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은총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은총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영(마음)적 노력이 있을 때 세상은 형성적인,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곳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원천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미리 형성하고 계속해서 형성해 나가는 신적 신비’에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곧 순명하는 종의 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의 부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더라도 그 부름에 자유롭고도 기쁨에 차서 ‘예’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모든 존재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신비를 비추어 내는데 우리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은총과 협력할 때, 이러한 협력은 우리를 영원한 음악과 조화를 이루는 화음을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마음)을 다시 새롭게 해주고, 다시 생기 나게 해주고, 다시 회복시켜 주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물을 깊이 마실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모든 현존과 활동의 통로들이 하느님 사랑의 빛나는 광채를, 결코 쇠퇴함이 없는 선하심을 비추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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