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그 물에 헹구고 빨아보지만/절고 찌들은 땟국은 빠지지 않는다.
흐려진 내 눈으로 보아도 내 마음은/아직도 명리 (名利)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음란의 불씨도 어느 구석에 남아 있고/늙음과 병약과 무사(無事)를 핑계로 삼아/태만과 안일과 허위에 차 있다. 더구나 나는 이렇듯 강에 나와서도/세상살이 일체에서 벗어나기는커녕/속정(俗情)의 밧줄에 칭칭 감겨 있으니/어찌 그리스도 폴처럼 이 강에서/사랑의 화신을 만날 수 있으며/싯달타처럼 깨우침을 얻겠는가?
끝내 나는 승(僧)도 속(俗)도 못 되고/엉거주춤 이 꼬라지란 말인가?
오오, 저 흐름 위에 어른거리는/천국의 계단과 지옥의 수렁!』
드물게 올곧은 원로로서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구상 시인이 병상에서 곧 펴낼 시집 「인류의 맹점」(문학사상사)에 실린 시들 중 「근황」의 일부분이다..
「관수재시초(觀水齋詩抄)」란 부제가 붙은 이 시집은 90년대 이후 간간이 산문만을 허락했던 구상 시인이 자신의 문학 인생 52년간을 되돌아본 절절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관수재」란 시인의 여의도 아파트 서재. 이곳에서 자신의 내면과 외피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성찰하면서,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에 자신의 「더럽고 추레한」 마음을 헹구고 빨아내면서 써낸 시들이 이번 시집이라고 말한다.
시집에는 지난 92년부터 「문학사상」에 발표해 온 연작시 「관수재시초」 36편을 포함한 근작 70여 편이 실렸다.
여기에는 유혹과 죄에 약한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혹여 시와 삶이 서로를 속이지 않았는가 하는 자신의 문학 작업에 대한 한없는 성찰과 구도적 탐색이 담겨 있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속이며 살아왔다…」
「여러 가지 가면과 대사를 바꿔가며/그래도 시인이랍시고 행세하고/ 천연스레 진-선-미를 입에 담는다」
어느 누구보다도 참 진리를 찾는 구도적 자세를 견지해 왔던 시인은 여전히 스스로를 한없이 낮춤으로써 오히려 드높은 영혼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는 심지어 「흐려진 내 눈으로 보아도 내 마음은/아직도 명리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음란의 불씨도 어느 구석에 남아있고/늙음과 병약과 무사를 핑계로 삼아/태만과 안일과 허위에 차있다」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과 같은 시를 향해 「이제 나에게서/너는 떠나다오」라고까지 외친다.
과연 어느 누가 이처럼 부끄러운 고백을 감히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사회적, 문학적 경륜과 덕망을 인정받는, 팔순을 바라보는 원로에게서….
시인은 이번 시집 출간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5월 교통사고로 지병이 악화돼 병상에 누워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씻어내면서 썼던 시들은 시인뿐만 아니라 시를 읽는 이들의 마음을 오히려 더 깨끗하게 씻어낸다.
출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