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위1체라는 용어에서 「위(位)」라는 개념은 희랍어 prsopon-가면(假面)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면극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役)의 연기를 합니다.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언제나 그이지만, 그는 자기가 쓴 가면의 역할에 따라 매번 다른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도 그 상황은 비슷합니다. 사람은 시간과 장소, 자격이나 주어진 소임의 성격 등등에 의해 각기 다른 호칭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또 다른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신부라고 불리며 그에 따르는 여러 성무를 집행합니다. 그러나 생가에서 저는 아들ㆍ형ㆍ오빠ㆍ동생으로 불려지며 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를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또 그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무궁세세에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을 성부 하느님으로, 인류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느님으로, 성부와 성자의 「사랑과 힘과 영(靈)」으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며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를 온전히 알고 또 그분께로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을 성령으로 인식하며 그분께 믿음을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간과 그 역할에 따라 완전히 따로 존재하시며 활동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께서,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께서 늘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태양에 견주어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불덩어리로서 밝은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덩어리와 빛과 열이라는 태양의 속성은 언제나 「함께」입니다. 절대로 그 속성들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내적사랑으로 온전히 하나이신 성부ㆍ성자ㆍ성령의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으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성부를 태양이라는 불덩어리에, 은총을 내리시고 계시의 빛을 인간에게 비추어 주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태양빛에, 그리고 따뜻한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주시는 성령을 태양열에 비겨 생각하며, 3위1체의 신비를 묵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처럼 3위1체 신비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더 생각해야 할 일은, 성부ㆍ성자ㆍ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사랑을 겸손되이 느껴 그에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3위1체이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그 「사랑의 내적일치」를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들 안에서 온전히 이루며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의 persona(가면, 역할)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살지 못해 그 이상(理想)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신적 장애를 겪게 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persona 곧 역할을 띠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때 우리가 늘 신앙인의 모습을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영육으로 건강하고 기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3위1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 사랑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은 「하늘나라의 좋은 친구」들임을!…. 기도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며, 사랑으로써 세상 모든 이와 일치하는 「3위1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위1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풍성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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