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의 입이 튀어나왔다.
“놀이공원 수영장도 문 열고 동해안 해수욕장도 좋은데 하필 성지예요. 아빠 정말 미워.”
“아빠에게는 너무 소중한 은사님이셔. 올해는 꼭 그곳에 가고 싶었단다.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될 거야. 아빠랑 갈 거지?”
투정 부리는 딸을 겨우 달래 길을 나섰다. 경기도 안성 미리내성지로 하루 휴가를 떠난다. 꼭 만나고 싶은 분이 그곳에 계신다.
말 그대로 폭우다. 안되겠다 싶어 차를 돌릴라 치면 어느새 해가 얼굴을 내민다. 변덕스럽다. 모니카는 “그거 봐요 아빠. 실내수영장 갔으면 딱 좋았잖아요”라며 여전히 불만 섞인 목소리다. 서울에서 한 시간 여. 물방울 마를 새 없는 차창 밖으로 ‘미리내성지’가 보인다. 날씨 탓인지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성지 뒤편 산자락에 구름이 걸렸다.
“자~이제 신부님 보러 갈까.”
순례자의 집을 지나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울창한 숲길을 걸으니 휴양림에 온 듯하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여름 소나기를 머금어 더욱 푸르다.
‘무명 순교자와 교구 성직자 묘지’ 푯말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가지런히 늘어선 성직자들의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맨 위 무명 순교자 묘에서부터 찬찬히 내려오다보니 좌측에 묘비가 보인다. 아담하다.
‘사제 도미니꼬 배문한’
“잘 아는 신부님이에요? 아까부터 꼭 만나야 한다고 하시더니.”
“그래 모니카. 내 은사님이시지. 신부님 뜻대로 나는 사제가 되진 못했지만 항상 기억하는 향기로운 분이란다.”
비가 잠시 그치고 해가 비친다.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이야. 벌써 15년이네. 요즘처럼 한참 더웠던 1994년 8월 어느 날. 신부님께서는 바다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돌아가셨단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사제’라고 남들은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분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하신 것 같아.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단다. 그분이 물에 빠진 이들을 구한 것만으로 오늘까지 나와 다른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는 건 아니란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그분은 성인이셨어.
화내는 얼굴을 뵌 적이 없는, 건강 땜에 운동을 못하셔도 함께 할 때는 열심히 하는 분이셨어. 늘 공부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하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닌데) 말씀하셨던 분이셨지. 오후 무렵 묵주를 들고 뒷짐 지고 수단을 입은 채 교정을 거닐며 기도하시는 모습이 마치 태산처럼 느껴졌단다. 발에 흙이 묻어도, 옷이 먼지에 부옇게 돼도 툴툴 털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시던 신부님이셨어.
사랑 빼면 신부님을 이야기할 수 없단다. 단어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혁명’이라는 말에 사랑을 붙이셨지. 신부님을 ‘사랑의 혁명가’라고 부르는 이유야. 헌데 신부님은 자신을 위한 사랑을 이야기하진 않으셨단다. ‘나는 오롯이 당신 것’이라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이웃에 대한 자선과 선행을 강조하셨단다. 이웃에 베푼 선행과 사랑은 곧 예수님께 한 것이고 곧 ‘천당의 건축자재’라고 설명하셨지. 신부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촌철살인’이었어. 교단에서 늘 신학생들에게 ‘사랑의 폭탄공장장’이 되라고, ‘십자가를 잘 지는 프로선수’가 되라고 하셨단다.
성령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부님께서는 한 마디로 설명하셨단다. 라디오 채널을 돌려 원하는 방송을 찾듯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항상 기도와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고 말이야. 안테나. 참 재밌고 신부님다운 표현이지 않을까.
왜 1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신부님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니. 비단 그리워할 뿐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그분의 희생을 따라야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고 싶단다. 얼마 전 신부님의 유고집이 나왔어. 1960년대 신부님께서 신학생 시절 쓴 글인데 우린 여전히 그렇지 못한 채 제자리만 맴도는 것 같아 부끄럽단다.
‘나는 내가 맡은 배역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앞날에 대해서 불안할 것은 조금도 없다. (중략) 오직 필요한 것은 다만 하나.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뿐, 내 모든 것을 당신을 위해 불사르는 것뿐이다(1964년 6월 21일)’, ‘사제는 자기가 맡은 영혼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맡은 아들·딸들의 영혼을 위해 굶을 줄 알고 헐벗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1964년 4월 14일)’, ‘이 사회가 하느님의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도록 온전히 자기를 죽이는 것이 사제다(1963년 5월 6일)’.
신부님은 하느님의 맛있는 음식을 위한 소금이셨던 거야. 그래서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셨던 이들을 구하셨지. 제일 큰 사랑은 생명을 구해주는 것이라고,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라고 하셨던 신부님은 그렇게 하셨단다.
아무리 더러운 것이 들어가도, 큰 바위가 빠져도 아무렇지 않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를 좋아하셨던 신부님은 그 바다에서 하느님 품으로 가신거야.
하늘이 다시 어두워졌다. 다시 비가 올 모양새다. 국화 한 송이 챙겨오지 못해 후회스럽다. 검은색 비석이 빗물을 머금었다. 묘역에 핀 붉은 장미도 빗방울을 가득 물었다. 모니카와 함께 기도를 바친다.
‘주님 도미니코 배문한 사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배문한 신부는…
늘 후학들에 이웃사랑의 중요성 강조
15년 전 물에 빠진 신자 구하고 선종
1934년 8월 경남 김해군 녹산면 생곡리(현 부산 강서구 생곡동)에서 태어난 배 신부는 1960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61년 가톨릭대에 입학했다. 1964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으로 유학, 1970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973년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배 신부는 귀국 후 여주본당 주임, 광주가톨릭대 교수, 서정동본당 주임, 수원가톨릭대 학장 및 초대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1994년 8월 5일 강원도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했다.
유고집으로 「꿈보다 현실이 아름답다」(진미디어/1994년), 「여러분 훌륭한 사제가 되십시오」(남양성모성지 출판부/2002년), 「나는 오롯이 당신 것」(광주가톨릭대학교출판부/2008년) 등이 있다.
■ 미리내성지(www.mirinai.or.kr)는…
은하수가 흐르는 골짜기(미리내)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묘가 자리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6위 무명 순교자 묘와 수원교구 성직자 묘소도 있다. 성직자 묘소에는 수원교구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 평생을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헌신한 이경재 신부 등이 잠들어있다. 성지는 수원교구의 ‘사제의 해를 위한 전대사 특별 지정 장소’이며 미사는 평일(월~토) 오전 11시30분, 주일에는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봉헌된다.
성지는 매년 10만 명 이상의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는 경기도 ‘안성 8경’중 한 곳이기도 하다. 추모여행을 겸해 들를만한 주변 명소로는 ‘안성맞춤 유기공방’(031-675-2590), 자연체험학교 ‘금다래 산머루’(031-673-4474), 민속마을 ‘예지촌’(031-674-6104), ‘안성허브마을’(031-678-6700), ‘한택식물원’(031-333-3558) 등이 있다.
※ 문의 031-674-1256~7 성지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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