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져 간다. 주일마다 성당을 찾지만, 진심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저 익숙한 습관대로 몸이 움직일 뿐이다.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육체가 편안함을 찾으면, 그것에 만족하며 또 마음은 잊혀져갔다. 간절함이 그리웠다. 주님을 찾으며 울던 그 때의 절실한 마음을 되찾고 싶었다. 무미건조해져 버린 신앙을 각성시켜줄 이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한여름, 영남지역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김보록 신부(로베르·1853~1922)를 찾아나선 이유다.
■ 선교의 교두보 ‘신나무골’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 충청·경기 지방에서 박해를 피해 내려온 교우들이 산중에 삶의 터전을 일구면서 생겨난 교우촌이다. 경상도 지역 사목을 전담했던 김보록 신부는 1882년경부터 이곳에 머물며 사목활동을 시작, 대구대교구 최초의 본당인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 전신)의 기반을 다졌다. 신나무골 학당(속칭 연화서당)을 설립해 한문·교리·서학 등도 가르쳤다.
김보록 신부를 만나기 위해 신나무골을 찾은 오후 2시. 그늘도, 바람 한 줄기도 없는 그곳에는 여름의 열기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나오는 날씨, 김보록 신부의 사제관이자 신나무골 학당으로 쓰였던 초가집 처마 밑 그늘로 몸을 숨겼다. 인적도, 풀벌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시간이 멈춘 듯한 한낮의 고요함. 조심히 방문을 열어봤다. 좌식의 제대 위에 정갈히 모셔져 있는 성모상과 성경. 한 평 남짓한 이 좁은 공간에서 저 성모상과 성경만이 김보록 신부에게 힘을 주었을 게다. 그 힘으로 퍼져나간 신앙이 지금 대구대교구의 초석이 됐다. 손으로 쓰다듬어 봤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사용한 듯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진다. 이 공간이 없었다면, 이 공간을 지켜나간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시작될 수 있었을까.
마당 한 켠에 자리잡은 김보록 신부의 흉상에 눈길이 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언어와 문화를 지닌 이들을 묵묵히 주님께로 인도했던 이.
‘무엇을 위해 깊은 산골 이 누추한 집에 머무르셨습니까. 당신이 뿌린 그 씨앗이 이토록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 육체가 잠든 ‘대구 성직자묘지’
발길을 돌려 대구대교구 성직자묘지를 찾았다. 이 땅에 신앙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이들의 육신이 쉬는 곳, 이곳에 김보록 신부의 묘소가 마련돼 있다. 영남 신앙의 기틀을 다지는 데 온 생을 바쳤던 그는 죽어서도 이곳에 남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일 낮 시간임에도 삼삼오오 모여 기도를 바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연신 부채질을 하던 손을 멈추었던 것은 그 조문객의 얼굴에서 더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 땡볕 아래서 연신 기도를 읊조리는 그의 표정은 평안했고 땀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 더위에 호들갑을 떨면서, 날씨를 가리지 않고 산을 타넘으며 신앙을 전한 이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러웠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들리지 않던, 그 조문객의 조용한 기도 소리가 귀에 와 박힌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직자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 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지금 이곳에 잠든 이들에게 찾아온 죽음이 내일은 바로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의미다. 내일 내게 죽음이 온다면….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지금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상상에 절망?아쉬움?두려움 같은 감정이 지나간다. 평생을 하나의 뜻으로 흔들림없이 살다가 여기 잠든 이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주님, 당신의 자녀로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했다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위해 매일을 살아왔던 것일까요….’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김보록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뮈텔 신부와 함께 공부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1876년 사제품을 받았고 1882년부터 경상도 지방을 전담, 신나무골에 머물며 이곳을 전교기지이자 신앙의 요람으로 일궜다. 그 후 새방골(현 대구시 서구 상리3동), 남산(현 대구시 계산동 부근)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대구본당의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급격한 건강 악화로 요양차 프랑스로 귀국했다가 회복하자마자 1913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전교 사업을 계속했다. 그 후 건강이 더욱 악화돼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 주교관에서 지내다가 1922년 선종, 대구대교구청 내 성직자묘지에 안장됐다.
▲ 찾아가는 길
신나무골 성지는 경부고속도로 왜관 IC에서 빠져나와 4번 국도를 타고 대구 방면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보인다. 신동본당 소속. ※문의 054-972-2014 신동본당
대구대교구 성직자묘지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3동 대구대교구청 내에 위치해 있다. 김보록 신부 뿐만 아니라 대구대교구 초대교구장 안세화 주교, 서정길 대주교 등 70여 명의 성직자가 묻혀 있다.
※문의 053-250-3000 대구대교구청
■ 인근 둘러볼만한 곳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왕묵도 신부’
신나무골 성지에서 왜관역 방면으로 10분 남짓 거리에 위치해 있다. 1909년 한국에 진출, 1952년에 왜관에 자리를 잡았다. 각종 선교활동은 물론이고 교육, 사회사업 등을 펼치며 이 땅에 신앙을 전했다. 그 중 특히 독일인 왕묵도(레기날도·1906~1975) 신부는 선교를 위해 1932년 한국에 입국, 신앙 유산을 남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1953년 왜관으로 와, 1973년 모금 운동을 펼쳐 신나무골 성지가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현재 ‘연화리 피정의 집’ 전신인 연화리 결핵 요양원을 개원, 결핵 환자들의 치유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개인·단체 방문 및 피정이 가능하며, 방문자는 수도원의 모든 기도 시간에 참여할 수 있고 미리 연락해 두면 면담 및 고해성사도 받을 수 있다.
※문의 054-970-2000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http://www.osb.or.kr
▨ 구상문학관 ‘평신도 구상’
올해 선종 5주기를 맞은 한국 문학과 가톨릭 문단의 거장, 구상(세례자 요한·1919~2004) 시인을 기리는 ‘구상문학관’도 왜관읍에 있다. 하루 평균 30여 명의 추모객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경부고속도로 왜관IC에서 빠져나와 매원교에서 좌회전 후 제2왜관교 우측 도로로 가면 찾을 수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차로 5분 남짓 거리. 참 진리를 찾는 구도적 자세를 견지했던 ‘평신도’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추모여행에 의미를 더할 듯.
※ 문의 054-973-0039 http://kusang.chilgok.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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