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혼기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여기 은퇴 사제들, 그들 삶 곳곳에 묻어 있는 애환과 열정 등을 담아본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은퇴사제들의 회고. 그 울림이 일반 신자들에게는 목자(牧者)의 정겨운 목소리로, 성직(聖職)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한줄기 빛으로 다가서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격동의 한세기를 살아온 원로 사제들의 증언이 오늘날 교회의 영성빈곤을 치유해주는 또 다른 빛이 되어주기를 기대해본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시리즈는 은퇴사제들의 이야기를 본지 기자가 구술정리 한다.
「회고록」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나는 『말하자면 회고록을 대필하는 작업』이라는 신문사의 제의에 다소 망설임도 없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회고록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서전은 더욱 안중에도 없었다. 또 근자에 들면서 광주대교구장 착좌 은경축(98년 11월)과 사제수품 금경축(작년 3월), 광주대교구장 퇴임(지난해 11월)을 맞아 여러 차례 언론에 나에 관한 이야기들이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된 바 있어 또 같은 주제로 인터뷰를 한다는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나의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획의 이름처럼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가겠다』는 은퇴 사제들의 단호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담고 싶다는 신문사의 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은퇴사제들 중에 나를 첫 번째 등장인물로 선정해준(아마도 가장 최근까지 사목 일선에서 활동한데다 교구장이었다는 점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신문사측의 배려에 감사하고 앞으로 나의 회고담을 읽게될 독자들에게도 미리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나의 일생에 깊이 개입하시어 특별한 은총으로 사제의 길을 준비해주셨다고 생각되는 몇가지 사건들이 뇌리를 스친다.
신학교 시절 월반(越班)하지 않은 덕에 50년 3월에야 사제품을 받게된 일, 49년 5월, 당시 평양교구장이셨던 홍용호 주교님을 비롯해 이북에 계신 두분의 주교님께서 공산정부에 의해 납치되어 사제수품이 성사되지 못했던 일, 6·25 전란 와중에 부산 포로수용소 사목시절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목격하며 삶과 죽음을 묵상했던 일 등등.
내가 만약 50년 이전에 사제가 되었다면 아마도 당시 평양교구 소속 사제들의 운명처럼 공산정부에 피납되어 지금은 교황청이 발표한 「20세기 신앙의 증거자」 명단에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기묘하게 나의 삶을 사제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한없는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이에 관한 이야기들은 뒤에 보다 소상하게 전개될 것이다.
나는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지금은 남포로 불린다)에서 아버지 윤상(베드로), 어머니 최상숙(빅토리아)의 5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부모님은 11남매를 낳았으나 6명은 채 장성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5명의 자녀중에 위로 12살 위인 큰형님이 계셨고 2살 터울의 둘째 형이 있었다. 셋째가 나였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명씩 있었다.
부모님들의 고향은 원래 평안남도 중화군 목재리였지만 결혼 후 진남포로 이주하시어 나는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화군 목재리 윤가촌(尹家村)에는 100여 세대가 부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진남포에 있던 제련소에서 일하시면서 본당회장과 전교회장을 겸하실만큼 열심하셨다. 집안 분위기는 당연히 신앙적인 열성이 넘쳤고 나는 출생 하룻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빅토리노」라는 세례명은 당시 본당신부이던 육신부님(파리외방전교회)이 내 생일과 같은 축일의 성인을 택해 지어주셨는데, 신학교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면서야 빅토리노 축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보다 12살 위인 큰 형님은 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릴적 기억에 대신학교 진학무렵 신학교 수학을 포기했던 것 같다. 이후 형님은 서울서 의학공부를 하셨고, 남한에서 유일한 혈육으로 사시다가 8년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매우 과묵한 성격이셨다. 내 기억에 방학을 끝내고 신학교로 돌아갈 때 역에 배웅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아마 지금 생각하면 사제가 될 아들의 정을 떼려 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자상한 면도 계셨다. 그때 우리 집은 진남포시장 안에 있었는데 걸인같은 이들을 보면 집안으로 불러들여 따뜻한 밥을 손수 지어 주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감명을 받곤 했다.
아버지는 형에게는 매우 엄한 모습이셨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관해서는 예외가 없었는데 한번은 성탄 자정미사 복사를 하고 다음날 낮미사 복사를 안했다고 크게 혼난 적이 있다.
당시 평양교구는 체계적인 신자재교육 프로그램들을 많이 시행했었는데 「재교육 팀」을 구성해 본당을 순회하며 교육시켰다. 어느날 진남포본당에서 교육이 있었는데 영원, 천국, 지옥 등 천주교의 주요 교리들을 어찌나 실감나게 설명해주는지 어린 내가 들어도 무척 감동적이었다. 또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때, 『죽기전 세례를 받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왜 어릴적 죽지않았나. 그때 죽었으면 직천당 할텐데』하고 심각하게 안타까워하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신앙적인 주변 환경을 감안하면 사제성소에 관한 나의 관심도 매우 자연스럽게 싹트지 않았나 생각한다. 특히 큰 형님이 사제의 길을 포기한 후 주위로부터 『신부가 되어야 한다』 혹은 『네가 신부가 되면 참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했다.
나는 혜성학교에 다녔는데, 내가 다니던 혜성학교는 4학년제였으나 내가 4학년일 때 5, 6학년반이 새로 생겼다. 당시 평양교구에서는 예비신학생들을 서포에 있는 성모보통학교(당국의 인가를 받은 학교는 보통학교라 불렀다)에 소집해 6학년 1년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교육했다. 기숙사라지만 초가집 두채가 전부였다.
사제의 길을 향한 나의 삶은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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