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방학을 보낸 나는 그해(50년) 3월 20일 장선홍 부제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일이 4월 15일로 예정돼 있었지만 당시 서울신학교 학장이던 정규만 신부가 장선홍 부제와 동창이어서 우리 둘만 서둘러 사제품을 받게 된 것이다. 장신부는 나와 동기였지만 나이는 5년이나 선배였다.
3월 21일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했다. 기묘한 방법으로 나를 사제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느님의 뜻을 되새기니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월남한 나로서는 축하해줄 가족이나 친척들이 없었다. 그러나 월남한 진남포 신자들의 보살핌은 각별했다. 또 평양출신 신우회원들도 첫미사 날 성대하게 축하식을 베풀어주었다. 중림동본당 주임 신인식 신부가 이런 모습을 보고 『남한 출신 신부 보다 축하식이 더 거창하고 성대하다』며 격려해주던 말이 생각난다. 평양출신 신우회는 지난 금경축때도 축하인사를 왔었다.
수품 후 나는 명동성당 보좌로, 장신부는 성가기숙사 사감으로 사제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기남 주교님의 충청도 사목방문에 동행한 것이다. 초행길이 낯선 탓도 있었지만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매일 수백명씩 몰려드는 신자들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나의 첫 사목경험은 고해성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갓난 사제였던 내게 이 경험은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하느님의 대리자인 사제의 직무를 실감하게된 기회였고 고해성사의 의미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혼성합창단 지도신부와 계성초등학교 교사로도 활동하며 바쁘게 3개월을 보냈다.
6월 25일은 주일이었다. 오전 미사를 끝내고 점심 후 합창단 가을공연 후원문제로 신태민씨(당시 연희대 학생이면서 경향신문사 기자였다)를 신문사에 보냈는데 숨을 헐떡이며 성당에 들어선 그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26일까지 『희망이 있다』는 소식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절대 사수』라는 방송이 들려왔다. 그러나 27일 오후가 되면서 서울 거리는 피난행렬로 뒤덮였다. 신학교도 해산됐다. 28일에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오후가 되자 인민군 탱크가 시내로 진입했다. 서울이 완전 점령된 듯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다. 장금구 본당신부는 자율결정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북 출신이어서 체포가 염려됐으나 피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교황사절 방주교가 명동성당에 피신중이었는데 7월 10일 비서였던 부신부와 함께 납치됐다.
며칠 후 인민부 내무서에서 사람이 와서 나를 데려갔다. 중부경찰서에서 온종일 조사를 받았다. 월남 경위와 왜 피난가지 않는지, 오열(스파이)이 아닌지, 무슨 지령을 받았는지 등등…. 투옥되리란 예상을 깨고 그들은 나를 석방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교회소식을 전해달라』고 주문했다. 『반동분자 색출에 협조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일주일 후 나는 경찰서로 가던 길에 되돌아왔다. 그때의 내 심정은 『Mori melius est』(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 그대로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 말에 따랐다면 얼마간은 목숨을 부지했겠지만 결국엔 그들에 의해 처형됐으리라.
나와 당시 계성여중 교장이던 정욱진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두렵고 긴장이 되어 음식도 못먹을 정도였다. 피난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기준 부주교와 상의한 끝에 하느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당시 노기남 주교는 교황 알현차 유럽에 있었다). 신학교 기숙사에 숨었다가 용산 소신학교(지금의 예수성심수녀원)에 피신했다. 젊은이들이 의용군에 징집되던터라 외부 출입도 못했다.
9월 초순, 장충동 샬트르수녀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피신한 오기선 신부를 만날겸 이곳을 방문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용산으로 돌아가려는데 오신부님이 같이 있자고 해 며칠을 묵었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장신부는 시골로 거처를 옮기자고 했다.
하루를 꼬박 걸어 하남시 구산공소에 도착했다(아마 9월 8일로 기억된다). 그곳엔 이북과 광주 출신 등 신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전쟁상황이 궁금했던지 우리에게 물었다. 우리는 『오래갈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광주에서 온 신학생(전그레고리오)과 김안드레아 신부 둘은 고향으로 가겠다며 공소를 떠났다. 광주로 간 이들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신부가 설사약을 사러 나간 사이 전그레고리오 신학생이 납치되어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고 사는 것이 이처럼 순간에 갈렸다. 나는 『전쟁이 오래 갈 것 같다』는 우리말을 듣고 그들이 귀향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우울했다.
9월 16일 인천상륙이 감행됐고, 전세는 뒤바뀌었다. 그러나 이날, 용산에 피신해 있던 신학생 수명이 납치됐다. 8일전에 용산을 떠나 구산공소로 옮긴 우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하느님은 또 한번 이렇게 우리의 삶을 지켜주셨다. 앞서 말한 두가지 특별한 기회와 더불어 이 세가지 경우는 사제생활 가운데 나를 지탱해주는 영적인 기둥이 되었다. 『순교자의 몫까지 살라』는 하느님의 뜻을 되새기면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