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에 이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장선홍 신부는 같은 평양교구 소속 강신부와 함께 군인들을 따라 먼저 평양에 들어갔다. 나는 나중에 메리놀회 안몬시뇰, 길신부 등과 함께 평양에 갔다. 교황청은 안몬시뇰을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했고 나는 영유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부임을 앞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는 11월말 안몬시뇰의 명령으로 긴급히 서울로 이동했다. 곧이어 1·4후퇴.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임진강까지 후퇴했다. 나는 안몬시뇰과 함께 대구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나는 유엔군 소속 종군신부로 메리놀회 기신부를 보좌하며 수용소 사목에 전념했다. 당시 거제리와 서면, 온천장 등 5~6곳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나중에 이들은 거제도에 통합됐다. 수용소는 한곳에 수천명이 수용돼 있었고 나는 이들을 상대로 정신(윤리)교육도 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예비신자 교육도 실시했다.
특히 그때는 이질과 폐병환자가 득실했는데 임종대세를 받고 죽어나가는 이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초년병 사제 시절 노주교님을 따라 충청도 지방을 순회하며 고해성사를 주며 사제로서 특별한 체험을 한 나는 전쟁의 와중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며,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제로서 또 한번 소중한 체험을 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의 생활은 51년초부터 53년초까지 계속됐다.
메리놀회 기신부는 그 무렵(52년쯤으로 기억된다) 부산에 가톨릭도서관을 설립했다. 이 도서관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주교회의 사무처)의 전신으로 나는 수용소 활동 이후 1년 동안 도서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54년 봄, 부산가톨릭도서관이 서울 장충동(지금의 성 베네딕도회 근처)으로 이전하면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정식 발족됐고, 나는 총무를 맡아 합류했다. 총무는 지금의 사무총장에 해당된다. 54년 11월 나는 혜화동 성신중고등학교 교사로 옮기고 후임으로 정진석 대주교(현 서울대교구장)가 부임했다.
2년 정도 교사생활을 하고 56년 가을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60년 4월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나는 당초 신학교 교수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마침 그때 천주교중앙협의회 관장이던 서석태 신부(베네딕도회)가 귀원함에 따라 미국인 한신부와 함께 다시 CCK 총무로 합류하게 됐다.
63년 10월 9일, 그때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었다. 평소 보다 조금 늦게 아침을 먹고난 후 성당에서 묵상중인데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교황대사관 차량 기사였다. 『교황대사님이 부르신다』는 것이었다. 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제1차 회기때 한달간 참여했던 나는 「떼리뚜스(전문가)」로 공의회에 보내시려나 하고 생각했다.
급히 챙겨입고 교황대사관을 찾았다. 교황대사는 그 자리에서 『수원교구를 설립하는데, 초대 수원교구장 임명을 수락할 것인가?』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교황대사는 교황비밀(Pontifical Secret)이라면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고해성사때는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홀로 고민하다 선배 신부를 찾아 고해성사를 본 후 교구장직을 수락키로 결정하고 오후에 대사관에 통보했다.
10월 20일 로마에서 주교서품식 후 곧바로 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했고, 그해 12월 귀국해 12월 21일 초대 수원교구장에 착좌했다. 당시 수원시내 본당은 북수동과 고등동성당 두 곳뿐이었다. 북수동성당이 더 오래되었지만 고등동성당이 조금 더 넓다는 이유로 주교좌성당으로 정하고 주교관은 고등동성당 울타리 밖에 수녀원으로 쓰던 일식(日式) 집을 사용키로 했다.
성당이 비좁아 착좌식 축하연도 인근의 서울대 농대 강당에서 가졌다. 이날 축하예물은 바로 수원교구의 첫 수익금이 되었고, 그때 내가 썼던 장부는 수원교구의 첫 재정장부가 된 셈이다.
수원시내외를 합해 본당은 20여개. 그때 모든 본당신부가 한국인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외국의 지원이 전무해 어려움이 많았다. 신부도 부족하고, 재정도 부족하고, 교구로서의 외적 면모를 전혀 갖추지 못한 수원교구의 초창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교구민들의 자립의지를 북돋웠다. 다행히 신학생이 증가하면서 사제수급이 용이해졌고 신자들의 참여로 자립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수원교구는 순교자들의 땅이다. 미리내에서 매년 순교자현양대회를 가졌고, 이후 이곳은 전국적인 순례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때는 도로사정이 좋지않아 여름에 사목방문 할 때면 비포장도로를 달려 성당 근처 개울에서 먼지로 범벅이된 몸을 씻고 털고난 뒤 수단으로 갈아입고 성당을 방문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다 여유있고 정감이 넘쳤다.
이후 73년 10월 광주대교구장에 서임됐다. 10년간의 수원교구장 생활. 『10년이면 짧지않은 시간이다. 쇄신을 위해 떠나는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쓰시겠다면』하는 순명의 자세로 광주대교구장에 부임했다. 이후 수원교구는 김남수 주교님이 오셔서 참으로 훌륭한 교구로 발전시키셨으니 그때 내가 떠나온 것이 참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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