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임할 당시 광주대교구 역시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었다. 골롬반선교회 사목 지역이었던 광주는 현헤롤드 대주교님 후임으로 첫 방인 주교였던 한공렬 대주교님이 오셨지만 1년 남짓 사목하신 후 돌아가셨다.
내가 부임할땐 외국인 선교사제들이 다수였고 재정도 부족했다. 한 대주교님이 재정자립을 위해 특별히 의식계몽에 힘을 쏟으셨고, 공의회 이후 평신도사도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긴 했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재정적으로나 인력적으로. 사목적으로 내가 취한 첫 작업은 전임 성소국장을 임명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성소자를 계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 당시 교구차원에서 40여명의 유급 전교회장을 두고 있었는데, 교구 재정압박의 한 원인이었던 이 제도를 정리했다. 대신 본당 차원에서 유급 전교회장을 채용토록 했다.
그때 광주대교구가 타 교구에 비해 앞섰던 것은 명도회의 활동이었다. 이 명도회는 전교회장을 양성하기도 하고 주일학교 교재를 발간하는 등 지금의 교육국과 같은 역할을 했었다. 당시 명도회의 활동은 많은 다른 교구에 참고가 됐었다.
광주대교구장 재임시절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5·18 민주항쟁을 먼저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것이고, 나 역시 이때의 기억은 결코 아물지 않을 아픔과 상처로 남아 있다.
10일간의 악몽…,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그때 광주의 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이며, 당해보지 않은 이들은 짐작조차 못할 참극이었다.
광주민주항쟁 동안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5월 19일 가톨릭센터 6층 집무실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피를 흘리며 걷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사람을 보고 당장 응급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려가지 못한 일이다. 그 순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떠오르면서 『나는 강도 만난 사람 옆을 지나치는 제관이 아닌가』하는 죄책감이 앞섰지만 결국 내려가지 못했던 점이다.
또 하나는 정규완 신부가 보안대에 잡혀가던 밤 늦은 시각, 정신부의 전화연락을 받고서 당시 정의평화위원장이며 지산동본당 신부인 장지권 신부에게 연락해 『지금 정규완 신부가 잡혀가는 것 같으니 좀 가보라』고 했던 것이다. 당장 차편이 없다는 핑계로 장신부에게 부탁을 했는데 『택시를 잡아 타고서라도 당장 뛰어갔어야 했는데』하는 아쉬움이 두고 두고 남는다.
그날은 80년 5월 18일, 예수승천대축일이었다. 계림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주고 숙소가 있는 학운동 까리따스수녀원으로 돌아왔다. 계엄령 확대에도 불구하고 가두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거리에서 시위대와 계엄군과의 충돌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계엄군의 잔혹한 탄압행위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날 저녁, 계엄군의 잔혹한 행위를 직접 목격한 사목국장 신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이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갑자기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당시 교구청이 있던 금남로의 가톨릭센터 6층 집무실에서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탄압행위를 직접 목도했다. 시민들과 계엄군 간에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인들은 시민 몇 명을 붙잡아 금남로 한복판으로 끌고 와서 몽둥이로 때려눕히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시민들은 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계엄군 중에도 돌을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때 금남맨션 골목쪽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얻어맞았는지 흰상의를 입은 앞가슴과 등에 유혈이 낭자한채 길바닥에 질펀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금남로를 향해 몇걸음을 옮기려다 그 자리에 쓰러지곤 했다.
가톨릭센터 이방 저방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남로에는 군인들이 잡아온 시민들을 한사람씩 땅에 눕혀놓고 목을 군화발로 밟았다. 다른 곳에선 머리를 아스팔트에 대고 몸을 돌리게 하고,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 내려오면서 군화발로 사정없이 짓밟아 대기도 하고, 옷을 벗기고 곤봉으로 내려치기도 하는 등 게엄군들의 진압방법이 극렬해지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운전기사인 주바오로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주차장을 돌아나오는데 군인들이 길을 터주지 않자 바오로가 내리려 했지만 화를 입을지 몰라 그냥 차안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얼마후 길을 터줘 오후에 서울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 했다. 주로 광주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김추기경님이 『사람이 죽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저녁, 가톨릭센터 창문과 건물 내부가 파손됐다는 전갈을 받았다. 원래 레지오 마리애 서울세나뚜스 25주년 경축행사와 한국 정의평화위원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다음날(통행금지가 오후 9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귀가 준비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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