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에서 예비신학생 시절을 마치고 나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이전까지는 신학생 모두가 서울에 있는 동성신학교에 입학했으나 내가 입학할때부터 입학생의 반은 서울로, 나머지 반은 덕원신학교로 보내졌다.
덕원신학교에는 모두 24명이 입학했다. 그때 원산교구장이셨던 신주교님(독일인, 베네딕도회)의 말씀이 생각난다.
신주교님은 우리 신입생들을 보시고 『너희들중에 6명만 신부가 되어도 춤을 추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 입학한 동기들중에 결국엔 5명만이 사제품을 받았다. 입학하던 해 한학기를 바치고 8명이 탈락했다. 아마도 신주교님은 사제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예감하셨을 것이다.
덕원신학교는 모두 13년의 과정이었다. 중등과가 5년, 고등과 2년, 철학과 2년, 신학과가 4년이었다. 그리고 매넌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2년에 한번씩 받았다.
나의 입학 동기생중엔 김남수 주교(전 수원교구장), 시인 구상씨, 미국 교포사목을 하신 이종순 신부, 연변 출신으로 예비역 중장으로 전역한 김동빈 장군 등이 있다. 특히 김동빈 장군은 학생시절 별명이 「장군」이었는데 실제 장군이 된 사람이어서 기억이 새롭다.
덕원신학교는 규모는 작았지만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생활했다. 신학교는 독일에서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함께 있었고, 교수진도 대부분 독일인 베네딕도회 신부들이었다(서울과 대구는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교수진이었다).
신학교 분위기가 매우 자유롭고 가족적이었던 것도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독일인 교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성문화된 규율도 별로 없었다. 규칙을 엄하게 강조하기 보다는 신학생 하나하나를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세심하게 관심을 갖고 지도했다. 그만큼 인간적인 접촉이 많아 지도신부들은 『오늘은 누가 기분이 좋지 않구나』하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덕원신학교의 분위기를 짐작케 해주는 사례 한가지. 일제 말기, 폐쇄된 서울과 대구의 신학생들이 덕원에서 함께 생활하게 됐다. 산책시간에 서울서 온 신학생들이 질문을 했다. 『여기서는 어디까지 산책을 할 수 있느냐』고. 처음엔 무슨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나는 『시간에 맞추면 되지 특별히 정해놓은 제한은 없다』고 말해주었다. 주변이 농촌과 정원으로 둘러싸인 신학교의 특수성도 있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꼈었다. 신학교 생활 내내 이러한 관심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당시 태평양전쟁 발발(42년)로 메리놀회를 통한 평양교구 지원이 끊기게 됐다.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당연히 신학생 양성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그러자 평양교구는 전 신자들이 나서서 『우리 신학생은 우리 손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신학생 양성비 모금 캠페인을 벌였다. 소위 「한 본당에서 신학생 한명 돌보기」였다. 이때 평양교구의 정성과 열의는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수도사제로서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이러한 교구의 정성을 봐서라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수도생활에 대한 관심을 포기했다. 만약 이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마 수도사제로서의 삶을 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덕원신학교는 시골의 작은 학교일지 몰라도 교육 여건은 매우 훌륭했다. 특히 악기가 많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악기를 배울 수가 있었다.
나는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클라리넷 부는 것을 본 교장신부님이 『어린 학생이 입으로 부는 악기를 하는 것은 건강에 해로울 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긴 그때는 폐결핵과 같은 질병들이 만연했고, 잘먹지 못한 학생들의 건강 상태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사사로운 것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교장신부님의 말을 듣고 나는 당장 클라리넷을 그만 두고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이후 나는 가끔 학교 행사에 수도원의 수사들과 함께 작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그 어려운 시절에 전인적 교육 여건을 위해 힘썼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학교 시절 공부는 어려움이 없었다. 혜성학교 시절엔 우등상도 받았다. 예비신학생때 머리에 부스럼이 번져 하는 수 없이 병원에서 삭발을 하고 집에서 요양하느라 한달간 결석을 해야만 했다. 이후 학교로 돌아와 시험을 치니 48등이었다. 이때 외에는 공부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와 동기생인 김남수 주교는 고등과 2년 과정을 1년에 끝낼만큼 똑똑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그의 대신학교 입학(월반)을 상의하던 중에 교장신부님이 내게 『김남수 학생이 월반을 하려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물어왔다. 그때 나는 『월반하지 않고 이대로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김주교님은 월반을 했고 나는 그냥 남았다. 이때 월반을 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까지 내가 사제로서 살수 있게된 첫 번째 고비가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월반을 해서 48년에 사제품을 받았다면 아마도 49년부터 본격화된 이북공산정권의 교회박해때 납치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48년 가을에 사제품을 받은 김남수 주교는 연길교구의 유학 명령으로 곧바로 월남해 혜화동에서 보좌로 있다가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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