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을 가르며 백발의 사제가 걸어간다. 머리는 희어지고, 걸음은 더디나 천국을 향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양 중인 대전교구 변갑철 신부를 만나, 본당 주임신부의 직분을 내려놓은 후의 삶을 엿봤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하느님을 믿었던 한 사내가 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옹기를 구우며 연명하다 순교했다. 그의 아들도, 또 그의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가며 옹기를 구웠다. 옹기를 구우며 신앙을 지켜왔던 이 집안에 사제가 났다. 대전교구 변갑철 신부(65). 1974년 사제품을 받고 34년을 신자 곁에서 산 변 신부는 현재 햇빛이 잘 드는 조그만 마을(충남 논산시 연산군 고양리)에 자리 잡고 옹기를 구우며 지낸다.
“더 오래 신자들 곁에 있고 싶었지만, 건강이 허락지 않았어요. 지금은 요양을 하며 흙을 빚고 있지. 어떨 땐 이 흙덩이가 신자들처럼 느껴져요. 신자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주고 싶은 게 사제의 마음이잖아? 흙을 빚고 있으면, 꼭 신자들을 대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도 빚어보고, 저렇게도 빚어보고…. 그럼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하얀 고무신을 신고 물레를 돌리는 변 신부의 손끝,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겼다. 형체 없던 흙덩이에 곡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그릇이 되고 찻잔이 된다. 접시, 컵, 그릇, 항아리, 꽃병…. 변 신부가 2년간 만든 작품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공방 한쪽에는 고운 빛을 띤 도자기 성작이 놓여 있다.
“내 아들 신부가 셋이 있거든…. 신학생이 여섯 명이고. 성작을 구워서 선물할 생각이에요. 몽골에 가 있는 김성현 신부(대전교구·몽골 항올본당)에게는 내 처녀작을 선물했지. 앞으로 더 연습해서 미사제구를 다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도 흙을 빚어 나를 만드셨잖아요. 나도 그 창조 사업에 협조해 보려고. 세상에 뭔가 유익한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
대전교구에서 오랫동안 ME운동을 펼쳐온 변 신부는 2004년 부정맥·협심증 진단을 받았다. 의사의 실수로 수술이 잘못돼 심근경색증까지 얻게 됐다. 죽어도 본당 신부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변 신부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 끝에 지난 2007년 2월 서산 동문동본당 주임신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를 드리던 중 쓰러지고 말았다. 수많은 신자들이 모인 부활미사에서였다.
“그게 본당 신부로서 마지막이었어요. 아직 신자들과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변 신부는 사제로서 두 가지 꿈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부부 총회장을 세우는 거예요. ME운동을 하면서 많은 부부들을 봐왔지. 부부들이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서로 포기하지 않고 균형점을 찾아가거든요. 본당 일도 그렇게 하면 참 좋겠다 싶어요. 그렇지만 그 꿈은 이제 이루기가 어렵게 됐어. 또 한 가지 꿈은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님이 되는 것입니다.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처럼….”
변 신부는 두 가지 꿈에 대해 얘기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었다.
“내가 서품을 받고 첫 본당 신부로 나가 있을 때였어요. 축구 중계를 보고 있는데 토요일 오후에 신자 하나가 찾아와 고해성사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그만 깜빡 잊어 버린거야. ‘아차!’하고 부랴부랴 나갔더니 그 신자는 가버리고 없었어요.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그때 그 일이 내 마음에 빚이 됐어요. 30년이 넘어도 지워지지가 않아.”
변 신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젊었을 땐 혈기가 왕성하잖아요? 좁고 어두운 고해소에 앉아있기가 왜 그렇게 힘이 들던지 몰라. 그땐 신부수가 적고,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잘 보던 때였어요. 판공성사 때엔 몇 시간이고 고해소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했지. 기다릴 줄을 몰랐던 거예요. 기다리는 법을 배우려고 낚시를 배웠어요. 낚시꾼의 즐거움은 월척이거든? 고해소도 마찬가지야. 기다리다보면 냉담한지 10년, 20년 되는 사람이 찾아와요. 그런 신자를 만나면 잘 기다렸다 싶어요. 내게는 더 없는 월척이지.”
변 신부는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물레를 돌렸다. 손끝에서 동그란 옹기가 완성돼 나왔다. 매끄러운 표면 위로 윤기가 흐른다. 변 신부가 빙그레 웃는다.
“여기에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릴거야. 포도·밀·물고기가 내 주제입니다. 늙어가면서도 사제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싶어요. 성작을 굽고, 고해성사를 주고, 살아오면서 체험한 것들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독거노인이나, 마음이 힘든 신자들의 벗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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