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콘크리트 작업.
8월 4일 오전 7시 아침식사 시간. 본격적인 콘크리트 작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지난주에 콘크리트 작업의 쓰디쓴 맛을 본 단원들이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쉬고 만다. “휴.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콘크리트의 ‘콘’자만 나와도 속이 울렁거린다니까요. 어제 밤엔 꿈까지 꿨단 말이에요.”
위원석 부제가 어린 고등학생 단원들의 표정을 읽었는지 웃음을 지으며 사기 진작에 나선다. “우리는 이곳에 나눔과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을 다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동안 위 부제의 말이라면 곧잘 따르던 단원들이었지만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평소에는 멀쩡했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단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1조 조장인 박승민 교수(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 컴퓨터광고디자인과)도 힘을 보탠다. “자, 얘들아! 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어.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이잖아.”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드디어 콘크리트 작업이 시작됐다. 남자 단원들은 흙과 자갈, 시멘트를 섞어 콘크리트를 만들고 여자 단원들은 만들어진 콘크리트를 양동이에 담아 식당터로 날랐다.
“형, 누나들이 잘 이끌어주니 견딜만합니다.” 밤새 선풍기 바람을 맞아 감기가 든 현건우(그레고리오?제주 오현고1)군이 애써 힘을 내며 작업에 몰두했다. 몸이 좋지 않아 아침도 거른 박선영(테레사?서울 송곡여고1)양도 “그동안 함께 해왔는데 혼자 쉬면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큰 힘은 되지 못하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일하겠다”며 단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다.
무더운 오후, 하루 일과의 마지막 작업시간.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작업장 여기저기에서 단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윽, 나 못해. 하루 종일 삽질만 했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단원들의 푸념이 계속 이어졌다. 아침의 비장한 각오는 무더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예비역 형들이 작업하는 것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고등학생 단원까지 생겼다. 주말에 쉬었다고는 하지만 작업을 한 지 어느덧 7일째. 체력도 이미 고갈된 상태였다.
다행히 이날 작업량은 다 채워 조금 일찍 작업을 마칠 수 있었지만 다음 날의 일이 걱정이었다.
“내일이 최대 고비가 될 것 같군요. 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요. 이런 때일수록 사고 나기 쉽죠. 아이들의 건강도 다 체크하고 영양상태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박경석 수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휴식을 취하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8월 5일 작업 마지막 날. 콘크리트 작업은 이날도 단원들을 괴롭혔다. “아이구. 저걸 또 해야 하다니.” 작업에는 이골이 날 대로 난 조장 김준영(카시미로·26·해양대)씨도 콘크리트 작업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단원들이 노동을 통해 극기와 인내심을 배웠으면 하는데 잘 견딜지 모르겠네요.” 늦은 밤까지 단원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던 위원석 부제가 마지막 작업을 앞두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체력이 바닥난 단원들이 잘 버텨줄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이젠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는데 작업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삽질 한 번에 금방이라도 나가떨어질 듯해 보였던 단원들이 마지막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황순홍(베네딕토?서울 대원외고3)군은 예비역 형들의 쉬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작업에 몰두했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맑은 눈으로 저희를 바라보고 있는데 힘이 없어도 힘을 내야죠.” 2조 조장 이형석(스테파노·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씨 또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이곳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단원들은 가난하지만 항상 밝게 웃으며 인사해주는 현지 아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남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필리핀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고 하는데 이곳 아이들은 학용품비, 교통비가 없어서 학교도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저런 행복한 표정이 나올까요. 한국 학생들도 항상 밝게 웃으며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큰 누나 김수정(30·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씨도 현지 아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보름간 동료들, 현지 아이들에게 배운 것이 많은 단체생활이었다. 한국에서는 빈둥대며 시간만 때우면 봉사시간을 주는 곳도 있지만, 이번 봉사활동은 그동안 경험해볼 수 없는 노동, 나눔, 사랑, 동료애, 자립 등의 소중한 것들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훌륭한 학습의 장이었다. 열악한 환경은 단원들의 교과서였고 동료들과 필리핀 사람들은 선생님이었다.
다행이었다. 힘든 작업으로 혹여나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단원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박경석 수사와 위원석 부제도 “힘든 노동을 통해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 같다”며 단원들 곁에서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 후원 758401-04-006021 국민은행 (예금주 (재)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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