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게 있어서 사제 직무는 종의 직무다. 그는 동료 주교의 서품식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많은 이들에게 종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제가 종의 본분을 잊고서 탐욕과 허영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거드름 피우고 명령하기만 한다면 그는 이미 사제가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종이 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주교는 주교가 아닙니다. … 물론 주교라고 불릴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진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면 더 이상 주교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나쁜 주교’라는 말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나쁜 주교는 더 이상 주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제나 자신에게 청하는 사람들의 청을 다 들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그것을 사랑의 빚으로 여기며 살았으며, 틈만 나면 그 빚을 기워 갚으려 했다. 하느님 백성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청할 때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하느님의 종, 교회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로 여겼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박해나 전쟁 중에도 목자는 백성이 있는 곳에 더불어 있어야 한다. 백성이 피난길에 오르면 백성들과 함께 그 고난의 피난길을 걸어야 하고, 노약자들이 많아 더 이상 피난 갈 수 없는 지경이라면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목자도 끝까지 백성들과 더불어 남아야 한다. 마치 가라앉는 배의 선장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과 기꺼이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 목자란 자기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느님 백성이 있는 곳에 사제가 있어야 한다. 특히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곳에는 반드시 사제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자들이 입게 될 영적인 해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과 위로의 성사가 베풀어지고 기쁜 소식이 선포되며 생명의 성체와 성혈을 나누게 된다면 하느님 백성을 그 목자로 말미암아 절망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제직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에 더욱 절실하게 요청될 뿐 아니라, 그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게 빛난다.
종이 주인 행세를 하다가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고는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말씀이다.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주님을 모시십시오. … 그분께서 그대 방향을 잡고, 그분께서 그대를 이끌고 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마차의 주인을 모시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머리를 치켜들고 발길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길잡이가 없다면 불행합니다. 그 자유로 말미암아 그대는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서한 강해」7,3.)
※ 이 글은 가톨릭대 출판부의 「신학과 사상」 44호(2003년 여름)에 실린 최원오 신부의 ‘교부들의 사제영성’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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