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 38도 선 위이고, 바로 왼쪽에 있는 이 개울이 한국전쟁 당시 월남자들이 목숨을 걸고 넘었던 마지막 사선입니다. 개울만 건너면 자유의 땅이었지요. 인간적 자유뿐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수많은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이 사선을 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순교적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들이 이 자리에서 신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8월 29일 토요일 오전 10시 강원도 양양 성 글라라 수도원 앞. 38선 도보순례를 앞둔 1200여 명의 춘천교구 신자들의 표정에 엄숙함이 서렸다. 춘천교구 사목국장 신호철 신부가 말을 이어갔다.
“춘천교구 설정 70주년과 제3대 양양본당 주임으로서 38선을 넘나들며 사목하다 순교하신 고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는 오늘 선조들의 길을 따라 걸으려 합니다. 신앙 선조의 모범과 표양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의 발걸음이 신앙을 증거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신자들이 깃발을 들었다.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이슬로 사라진 고 이광재 신부의 얼굴과 춘천교구 깃발을 앞세우고, 그 옛날 인민군의 총살을 피해 숨어 걸었던 그 길을 당당히 걸었다.
성 글라라 수도원에서 양양성당까지 8km 여정. 코스 대부분이 험한 산길이다.
한 손에는 묵주를, 다른 한 손에는 깃발을 든 신자들의 행렬은 자그마치 1km가 넘었다. 긴 행렬이지만 20대 청년에서부터 80대 노인까지 1200명 모두가 한마음이다.
기도하며 걷는 순례길, 신자들의 표정 곳곳에 신앙 선조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새벽같이 달려온 신자들이다. 포천에서 춘천까지 6개 지역 거의 모든 본당에서 참여했다. 처음 70명의 작은 순례단을 기획했던 신호철 신부도 놀랐다.
“이렇게 많은 신자들이 참여할 줄 몰랐습니다. 전 신자들과 함께 떠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을 때도 최대 500명을 예상했는데, 1200명이 모였습니다.”
신자들의 신심은 실로 놀라웠다.
“옛날 선조들은 북에서 남으로 죽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덕에 지금 우리 신자들은 남에서 북으로 ‘삶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잊고 지냈던 신앙 선조들의 고난의 삶을 기리며 묵주기도 70단을 바치려고 합니다.”(조봉희 사도요한?춘천 퇴계본당)
대오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젊은이들은 어르신을 모셨고, 어르신들은 짐이 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서로 격려하며, 한목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다. 산 속 깊이 신자들의 기도 소리가 메아리쳤다.
“제가 가겠어요. 기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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