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인정하는 기투’(Appreciative Abandonment)의 삶을 산다고 해서 완벽한 ‘안전보장’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하느님 뜻에 온전히 내어 맡기면서 희생적으로 사는 만큼 하느님은 분명히 나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하느님 뜻에 온전히 내어 맡긴다’는 말 자체는 정신적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뜻은 늘 모호하다. 하느님의 뜻은 매시간 매 상황에 따라 달라 진다. 따라서 정신적 차원에서 하느님 뜻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삶은 아무런 보증도 받지 못한다. 일종의 모험이다. 나는 하느님 뜻을 완전히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인정하는 기투를 하는데 따르는 모험은 형성의 신비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과 세계의 현재 미래의 형성을 도울 것이라는 희망에 의해 지탱될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는 큰 틀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모호한 상태지만, 이 모호한 형성의 신비께서 분명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초자연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신앙인들은 정답을 미리 알고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과 같다. 신앙에 기초를 두는 사람은 초우주적인 부분까지도 생각을 하면서 판단을 하기 때문에 의식이 넓어지게 된다.
열려진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생활할 때 우리의 삶 자리가 차분하고 침착하며 자유스럽고 평안한 마음이 된다. 즉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고, 자유스럽게 살아 갈 수 있다.
삶은 모호하고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고 왜곡된 형태를 띨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인생을 다 살고 나서도 삶이 애매모호하고 비합리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의연해져야 한다. 내일의 삶을 정확히 모르고, 그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미래는 모호할 뿐만이 아니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며 별 의미가 없다. 생각 자체는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중요한 것일지라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늘 수정과 받아들임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흔들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흔들리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많이 흔들리고 있으며, 미래에도 흔들릴 것이다. 아무리 정확한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만해선 안 된다. 흔들릴 때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때가 바로 제일 위험할 때다. 흔들리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자칫 자기 독단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히게 될 수 있다. 구세주 강박 관념 (savior complex)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이 세계와 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구세주로 간주하는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아닌가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삶이 풍요롭게 된다. 결국 하느님과의 의존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의 흔들림은 빨리 회복되며, 웬만한 문제는 거의 대부분 해결된다.
이럴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성숙한 고통으로 나아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의 고통을 체험한다. 하지만 흔들림에서 극복되면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 후에는 하느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게 된다.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를 시켜야 하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릴지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때의 고민은 나쁜 의미의 고민이 아니다. 뜨거운 물이 고통과 시원함을 동시에 안겨 주듯이 이 때의 고민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준다. 이때 사용되는 에너지는 소비적 에너지가 아니다. 초월적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초월적 에너지는 정확한 판단에 바탕해야 한다. 삶의 매 순간에 판단을 잘해야 한다. 형성하는 신적신비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하느님의 뜻에 합치하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 내려야 한다. 또 주변 상황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융화의 판단을, 세계를 향해서는 우리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참된 역량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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