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분도회에서 한국에 진출한 첫 번째 목적은 가톨릭 사범학교를 운영하여 가톨릭 선생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분도회의 교육 선교 범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실업 교육·보통 교육·여성 교육·유치원 교육, 그리고 신학 교육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
식민지 시기 가톨릭 교육은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많이 연구된 분야는 아니다. 개신교의 미션 스쿨이 한국 근대 형성에 기여한 공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반면, 이에 상응하는 가톨릭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식민지 시기 가톨릭 교육을 근대 교육 제도의 도입, 신학문의 수용, 국민 계몽 또는 하층민의 지적 향상과 생활 향상이라고 단순히 결론짓는 것이야말로 근대화 논리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교육 선교가 지식의 축적, 생활 환경의 직선적 발전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도회 교육은 일차적으로 선교를 목적으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지식 생산과 식민 지배의 관계를 봤을 때 선교사들의 지식 생산과 교육이 일본 식민 지배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분도회는 오래된 자체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자신만의 정체성과 나름의 ‘독일식’ 교육 제도를 고집하였다. 수공업과 실업 교육, 신학 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영어가 아니고 독일어를 현대 외국어로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분도회의 고집과 선교 목적이 식민 지배에 전적으로 포섭됐다거나 그 일부분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분도회가 식민 국가에 도전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듯 협력도 아니고 저항도 아닌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식민 지배에 대한 참여와 자기 이해의 관철 사이에서 오갔던 것, 다시 말해 견제와 접근의 동시성이 식민지 시기 분도회 지식 생산과 교육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교육을 통한 개인적 발전의 가능성과 공적인 활동에서 기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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