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영배 신부)는 9월 19일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제3차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서는 한국 천주교 창설주역(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에 대한 사료 연구를 통한 생애, 천주교 수용과 교회활동, 천주교에 대한 인식,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등을 주제로 한 논문 발표와 논평, 종합토론이 마련됐다.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요약, 연재한다.
◆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고백 -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원재연 박사·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선교사들 앞에서 복음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그러한 의지가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창설한 직후 최초로 닥친 1785년의 을사박해를 계기로 외형적으로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양의 유교적 전통 위에 서양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접목시키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세례성사를 통해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모방성직제도의 활용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열심을 불어넣음으로써 박해에도 불구하고 단기간 내에 조선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 과정에서 독성죄(毒聖罪)를 저지른 자신과 동료들의 부족한 교리지식을 절감하고 성균관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반촌에서 교리강습회를 열 정도로 더욱 신앙과 교회활동에 분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독성죄를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조선 교회에 전해줄 사제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그는 제사 문제를 논하는 과거 시험에서 백지 답안을 내거나, 평택현감에 부임해서도 공자 사당에 절을 하지 않는 등의 수계생활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면서도 지켜왔던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사건으로 다시 예산에 귀양 가면서 중단됐으나, 언제고 떨쳐 일어나 교회로 복귀하려는 사신(死信, 믿음의 뿌리)만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1801년 신유박해 때 비록 말로는 천주교를 배척하고 신앙을 부인했지만, 신자와 교회를 보호하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한편 달레와 다블뤼는 이승훈이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죽었지만 배교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가했는데, 이러한 교회 측 평가와는 달리 박해자와 척사론자들은 이승훈이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음을 외형적으로 입증해주는 ‘결안(結案)’을 남겼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또는 그로부터 1세대 정도 뒤의 신자들 사이에는 초기교회 창설과정에서 열심히 활동한 이승훈 베드로가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는 ‘죽음에 대한 평판’을 교황청 문헌과 김대건 신부님의 기록을 통해 남겨주었고, 그의 후손들은 ‘유시(遺詩)’를 구전(口傳)으로 전해주면서 그의 순교를 사실로 확신하였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이승훈 베드로가 죽음 직전까지 자신의 배교 행위에 대한 회개나 이를 대신할 천주께 바치는 신앙고백을 직접적으로 관찬 또는 교회 측 기록에 남기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순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릴 수는 없게 된다.
어쩌면 이승훈 베드로는 사형 판결문에 수결(手決, 사인)을 한 후에 형장으로 끌려갈 때부터 희광이의 칼에 그의 목이 잘려질 때까지 불과 몇 시간 정도의 생의 마지막 짧은 순간에, 가족들과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천주께 신앙을 고백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증거는 관찬기록에도 보이지 않고 교회 측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기에 그를 순교자라고 쉽사리 단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당대에 이승훈 베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단히 신중한 태도로 ‘그의 죽음이 선사(善死, 殉敎)인지를 천천히 조사해 보겠다’고 한 황사영 순교자 자세를 본받고 싶다. 이승훈 베드로는 조선교회 창설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수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와 교리를 보급하고 신앙공동체를 확산시킨 ‘이른바 원죄(原罪)’ 때문에, 그는 박해자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고, 어떤 변명을 해도 필경에는 박해자들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굳이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단죄(斷罪)하는 것은 성급하고 안이한 판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앙고백의 형태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가 순교했을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의 최후 발언 또는 행위와 관련된 기록들을 비롯하여, 당대와 후대의 그의 죽음을 둘러싼 평판에 대해서 차근차근 재검토하고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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