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달레 책에는 권철신은 1779년 강학 때 서양 과학기술 서적들뿐 아니라 천주교 서적도 검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여러 자료를 검토해 볼 때 그가 서학을 처음 접한 시기는 1784년 9월 책을 싸들고 그의 집을 찾아온 이벽을 통해서이고 이때부터 천주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고 생각된다.
권철신이 서학을 접한 시기가 늦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호 이익이 서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신후담, 안정복 등의 제자들에게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적극 계몽했지만, 서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이익과 함께 서학에 대해 논의한 제자들로는 신후담, 안정복 외에 황운대, 이병휴, 윤동규, 이휘조, 정항령, 홍유한 만이 찾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익의 제자들인 윤동규, 이병휴, 안정복 등의 대에 가서는 서학에 대한 논의가 위축되다가 그들의 제자들인 권철신, 이기양, 한정운 등의 대에 가서는 서학에 대한 논의가 아예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서학에 대한 논의가 갈수록 활성화되지 못하고 도리어 위축되다 중단된 것은 성호학파 내에서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갈수록 거세져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서학에 대한 불씨를 다시 살린 사람은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이었다.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천주교 서적을 들여온 것을 계기로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때 천주교를 대거 수용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고 지방 각지의 신앙공동체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권철신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그들이 천주교 수용을 주도하게 된 것은 스승인 권철신의 유학사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 권철신은 천주교 수용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천주교 수용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권일신은 문학을 좋아했던 아버지 권암, 장인인 안정복, 안정복의 문인인 이인섭, 이병휴의 제자인 이기양, 형인 권철신 등의 밑에서 두루 수학하였다. 이들 여러 스승들 가운데 학문적으로 영향을 많이 준 사람들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사상체계를 모색하던 이기양과 권철신이었다. 그는 형 권철신의 학문 전반을 그대로 따랐다.
권일신은 1784년 9월에 이벽을 통해 서학을 접하고 즉시 천주교를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도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뒤에 천주교 서적을 꼼꼼히 읽은 뒤에 비로소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그는 가족들 전부를 권유하여 천주교를 믿게 하였고, 나아가 경기도 양근과 포천, 충청도 충주와 내포, 전라도 전주 등의 지역에도 친인척과 형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여 천주교가 사방으로 전파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또한 권일신은 교회의 지도자로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우선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이 되었고, 1786년 가성직제도 설정 때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789년 말에 북경교회에 밀사를 파견할 때 우리나라 교회를 대표하여 북경으로 보내는 서한을 이승훈과 각각 한 통씩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785년 추조적발사건과 1791년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으로 교회 창설의 주역인 이벽과 이승훈이 교회를 멀리할 때에도 흔들림 없이 홀로 교회에 남아 난국을 헤쳐 나갔다. 이러한 점에서 권일신은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안정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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