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료를 통한 권철신·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박광용 교수, 가톨릭대학교)
권철신, 권일신 두 분이 말씀을 받아들인 근본 바탕은 신유년 심문 과정에서 나온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보냈다는 편지 내용인 영혼설-4원소설-주재자에 대한 흠숭(예절)이라는 문제, 곧 (자신의) 영혼과 지혜를 다하여 이 세상의 주재자(하느님)께 올바른 흠숭을 드려야 한다는 학자적인 바탕에서 나온 신앙이었다고 판단된다.
권일신의 경우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당시의 ‘교주’로서 고발되어서, ‘금지사무사술’조의 적용 여부를 놓고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권일신은 ‘교주’란 자기에게 당치도 않다고 항변하였고, 다만 ‘예수’의 추종자로서 처벌한다면, 그 처벌은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자세를 일관되게 지켜냈으므로 그렇게 판결이 내려졌고, 그 자세에 대한 처벌로 마지막 심문에서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혹형을 면치 못했다고 판단된다.
그 뒤 3일 동안의 집중적인 회유로 그는 ‘배교’ 문자가 명확한 회오문을 바침으로써 감형되었다. 이 회오문은 보통 결국 80세 노모에 대한 인성적 사랑 때문에 신앙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든지, 배교라고 볼 수 있다든지 하는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권일신 자신은 회오의 이유를 공적, 사적으로 4가지를 들고 있다. 사적인 삶으로는, 노모의 사랑에 대한 보은이 특별하게 강조되기는 하지만, 그보다 하위에 있는 (자신 때문에 연루된) 형제들에 대한 자애 역시 말하고 있다.
공적인 삶으로는, 창업(개국)공신 집안 사람을 보호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에 대한 보은이 특별하게 강조되기는 하지만, 그보다 상위에 있는 사랑하여 살라고 하는 하늘의 ‘지극한 뜻’에 대한 보답 역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공적인 삶 때문에 사랑하여 살라고 하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란,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적시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기는 어렵지만, 주재자이신 하늘에 대한 믿음, 사랑, 희망을 지킨다는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당시 성직자 영입의 허락은 받았으나 입국시키는데 실패한 교회의 정황과 그의 심복 제자인 윤유일이 그 후 성직자 영입에 전력하는 행적으로 미루어 추정해 볼 때, 아마도 주재자(하늘)에 대한 올바른 흠숭(예배)을 위한 성직자 영입이 자신이 공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권철신의 경우, 진산사건 이전에(편지글로 판단하면 1784년 갑진년) 이미 말씀을 실천하여 지킬 수 있는 방안은, 당시로서는 그 정신을 말없이 스스로 수행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 후 진산사건으로 권일신이 심문받고 죽은 이후에는, 누가 보더라도 ‘이 세상으로부터의 퇴거(은수)’의 삶을 택한 것이 환하게 드러났다고 판단된다. 권철신의 명성은 이로써 성리학적 사회에서는 끊어졌으나, 교회공동체에서는 그대로 이어졌다고 판단되고, 이 때문에 신유박해 때 드러난 신자로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심문과정에서 권철신은 진산사건 이전의 사실은 대체로 인정하였고, 스스로 천주교 입교의 계기와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는 결국 ‘영혼과 지혜를 다하여 주재자(천주)를 흠숭해야 한다’는 복음적 삶이 옳은 길이라서 선택했다는 신앙고백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조상제사의 경우는 폐하지 않고 행하였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하였다.
그 이후 교회를 떠났다거나 서학을 ‘사학이므로 배척하여 끊었다’고 판단할만한 언사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심문자의 말을 받아서 되풀이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정조 임금의 은혜를 배신한 사실이 없으므로, 그 사실로 죄가 되어 죽을 수는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판단된다.
또한 심문 내용이 교회공동체 및 다른 교우들이 계속 연루되는 유도 심문이 대부분이어서, 이를 자신의 오랜 ‘은거(은수)’ 상태를 근거로 들어 적극적으로 회피하였다고 판단된다.
결국 권철신은 네 번째 문초에서 문도 윤유일의 북경 왕래 및 주문모 신부 영입 사실들을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관에 고하지는 않았다는 ‘지정불고’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이로써 2차 심문 이후는 노령과 지병으로 형이 정지되었지만, 그 당일에는 심문하는 장의 한도인 30대까지 맞고서 나흘 뒤에 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이는 권철신은 곧 ‘주재자에 대한 올바른 흠숭’ 문제인 성직자 영입 문제에서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의미로서, 그 이전 언사와 관계없이 이 자세가 핵심적으로 시종일관된 것임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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