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최인각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이 세 사람은 조선 사회 안에서 최고의 지성인들이요, 지도자들이었으며, 조선 천주교회 최고의 선각자들이었고, 죽음 직전까지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이 자신만을 살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가성직제도도, 북경에 보낸 서신도, 성직자 영입도, 그리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기본윤리(효도와 충성)였던 유교를 존중하면서도, 으뜸 아버지와 임금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교 윤리 자체를 폐기되어야 할 사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교가 가르치는 현세적 윤리 외에 천상의 윤리가 있음을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았다.
심문내용과 결안문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심문내용과 결안문을 보면, 표면상으로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신앙을 부정하고 배교하였는가?’를 반문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박해자들이 세 사람에 대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겉으로만 그렇게 행동한다’ 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해자들 자신들마저 이 세 사람의 진술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훈의 최후에 관한 박해자들의 기록과 권일신과 권철신의 최후에 관한 가문의 최고본 족보(1807년의 木版本 安東權氏 族譜)에 잘 나타나 있다.
본인은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진술에 대해 허위진술, 혹은 묵비권 행사 등으로 특징지었다. 이들은 심문 중, 이미 밝혀진 사실이나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외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허위진술과 묵비권 행사로 일관하였다. 이를 고찰하면서 본인이 숙고한 점은 ‘왜 세 사람이 심문 과정 중 허위진술과 묵비권 행사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보통 순교자들의 경우,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데 반해, 조선 천주교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태도는 오늘의 우리가 보아도 의아한 점이 있다. 본인은 이 점에 대해 당시 사회의 상황과 조선 신앙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성직자가 전무(全無)하던 시대의 평신도 사목자로서의 한국 교회를 대표한, 이 세 분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고려하였다.
평신도 지도자의 근본요건
이들이 평신도 사목자로서 최선의, 최고의 본분이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데 있다는 평신도 지도자의 근본 요건에 대해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미치는 자신들의 영향력과 조선 천주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 단순히 자신들이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것이 가져올 해악을 생각해야만 했다. 이러한 인정은 신자들에 대한 고발이며, 조선 천주교회 조직의 내적 와해를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교자라는 자신의 명예의 실추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해자들은 이들 평신도 지도자들이 지닌 신앙에 대한 증오심도 갖고 있었지만, 이들을 엄벌함으로써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려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으려는 최종의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이들을 추궁하고 심문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의 해석을 통해 권일신·권철신·이승훈의 순교평판에 대해 교회법적인 평가의 기반을 삼은 것이다. 이들은 조선 천주교회에 성직자가 없던 당시 평신도 사목자로서의 본분, 곧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며, 교회를 유지하는 직무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태도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에 대한 신앙,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그리고 사목자로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사랑이 모두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상생의 철학과 영성’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즉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은 자신도 살리고, 부모도, 임금도, 성직자와 신자를 모두 살리기 위한 철저한 삶을 살다가, 박해자에 의해 죽음을 당한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지도자이며 순교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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