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부터 처벌하라!’
30~40대 젊은 산부인과 의사들(‘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 소속, 이하 진오비(gynob, gynecology obstetrics의 줄임말))이 낙태근절을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사회 각계의 눈이 이들에게 쏠렸다. 인공임신중절(이하 낙태), 특히 97%에 달하는 불법 낙태는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지만 숨기기에만 급급해온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기 때문이다.
낙태근절에 참여한 의사들은 11월 1일부터 낙태시술을 전면 중단한다고 밝히고, 성명서에 이어 대국민 호소문과 결의문을 내놓았다. 성명서에서 의사들은 가장 먼저 그동안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해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어 “사회 경제적 사유와 태아 이상으로 인한 임신 중절은 현행법상 모두 불법 낙태’라고 강조하며 엄정한 법 집행과 낙태근절운동 동참을 촉구했다. 이러한 의사들의 희생적인 행보는 단순히 낙태시술을 하지 않는 이벤트성 선언이 아니라, 불법 행위 자체를 없애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의 하나로 더욱 의미가 크다.
사회 각계에서는 이번 움직임이 낙태 근절을 위한 보다 실천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오랜 시간 낙태 근절과 생명수호에 앞장서왔지만, 범국민적인 실천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교회는 보다 능동적이고 발 빠른 지지와 동참에 나섰다.
정진석 추기경의 지지 격려사에 앞서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생명운동본부 위원장 장봉훈 주교도 10월 29일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고, 올바른 생명보호 정책과 법 제정, 의료수가 현실화, 올바른 성교육 등의 실현을 촉구했다.
우리사회의 낙태는 의사들의 자기합리화와 사회각계의 무관심, 정부의 무대책에 맞물려 수십년간 방치돼왔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데 의사들이 먼저 나섰다. 이들의 발걸음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 비뚤어진 가치관, 지나친 불감증
“1970년대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 1980년대 ‘한 가정 사랑가득 한 아이 건강가득’. 1990년대 ‘선생님 착한 일 하면 여자짝꿍 시켜주나요?’, ‘아들바람 부모세대, 짝꿍없는 우리세대’. 2000년대 ‘한 자녀보단 둘, 둘보단 셋이 더 행복합니다’,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보건복지가족부와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 등 정부 기관에서 연대별로 제시했던 출산 관련 표어들이다. 정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낙태시술법을 피임법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엔 저출산 때문에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아이를 낳으라고 아우성이다.
신생아 대비 최고의 낙태율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낙태 실태를 한눈에 드러내는 통계자료를 들여다보자.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자료로는 지난 2005년 복지부가 발표한 ‘전국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가 유일하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해 시술건수는 34만 2433건으로 추정됐다. 2005년 출생아 수는 43만 5031명이었다. 고임신에도 불구하고 저출산이 양산되는 이상한 결과는 바로 낙태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시술 대상자 중 42%는 미혼자였다. 특히 미혼의 96%는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기혼의 76.7%는 자녀를 원하지 않거나 원하는 성별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술을 했다. 게다가 15세 미만은 물론 45세 이상까지 가임기의 전 연령층에서 낙태가 이뤄지고 있었다. 최근 낙태시술 건수는 해마다 급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낙태시술을 해도 건강보험공단 기록에 남지 않는다. 병원 등의 너그러운(?) 배려 때문이다. 낙태시술 관련 정보를 찾는데 장애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인터넷에서는 병원간판을 걸고 낙태시술 홍보를 한다. 임신주수별 수술비용에서부터 추천 의사 명단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 진오비의 성명서 발표 직후 진행된 KBS방송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3.7%가 불법 낙태시술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현재 합계출산율은 1.1%대다. 1970년대 합계출산율은 4.5%였다.
▲ 의사·정부·국민 모두가 불법 저지르는 공범
사회 전체가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그릇된 행위다’ ‘낙태 문제를 공론화해서 해결점을 찾아야한다’는 입장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행동은 정반대다.
우선 의사들은 낙태와 관련해 “‘나 같아도 낙태를 결심하겠다’, ‘불쌍한 여자들이 더 많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일부 의사들만 안한다고 임신부가 낙태를 못하는 것은 아니며, 의사들이 낙태를 거부하면 무면허 시술 등이 성행하고 여성의 건강은 더욱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때문에 상당수 산부인과 의사들은 진오비의 최근 행보에 대해 그 동기와 방법의 순수성에 물음표를 달고 나서기도 했다. “대부분의 낙태는 비의학적인 이유와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행해지기 때문에 의사만 처벌해선 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진오비는 이들의 주장이 ‘자기 합리화’라고 단호하게 지적한다.
정부는 낙태에 대해 사회 각계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근절되긴 어려운 듯하다는 미지근한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는 생명포럼 운영과 법 개정 등을 통해 문제 해결에 지속적으로 힘쓰고 있다고만 되풀이한다. 덕분에 정부는 낙태시술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의사들을 통제하는 데만 급급했다는 항의까지 받고 있지만 뚜렷한 정책을 내놓진 못했다.
제도 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할 사법부는 법 집행에 수동적이다. 실제 한 해 수십만 건의 낙태가 이뤄져도 정식재판에 회부된 건수는 한해 1~5명이 고작이다.
국민들의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희박한 것은 더욱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의사가 낙태시술을 거부하면 화내고 따지고 드는 주체가 바로 국민들이다. 미혼모는 비도덕적이고 인생도 실패한 사람이라고 차별하는 주체도 바로 국민들이다. 여성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낙태를 옹호하는 일부 여성계의 움직임은 더욱 큰 장애물이다.
▲ 사회 인프라 구축·의식개선 동시에 진행돼야
사회 각계는 낙태를 멈추기 위해 가장 시급히 마련해야 하는 대책으로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지원을 꼽는다.
이에 따라 여성들도 임신 자체가 보호받고 출산과 양육의 부담을 사회가 같이 책임지는 시스템 구축이 진정한 여성인권 회복의 길임을 알고 힘을 보태야 한다. 또 산부인과 의사들이 불법이 아닌 정상적인 진료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올바른 의료정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부인과 병원이 아이를 죽였을 때보다 태어나게 했을 때 이익이 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청소년들의 성교육 강화와 생명윤리의식 고양, 미혼모 지원 등이 동시에 펼쳐질 때 불법 낙태는 실질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이 같은 부분은 가톨릭교회가 오랜 시간 전문적으로 지원해온 활동이기도 하다. 특히 종교계 등 사회 각계에서는 지난 7월부터 시행 중인 모자보건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폐지 등을 촉구하고 있다. 낙태를 허용하는 독소조항을 포함한 모자보건법이 시행된 지 36년 만에 처음 개정됐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각계 전문가들조차도 낙태 허용기간을 28주에서 24주로 당기는 정도의 변화는 불법낙태를 줄이는 것과 별 관련이 없다고 역설한다.
신생아 대비 세계 최고의 낙태율을 보이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료계의 결단뿐 아니라 정책과 법제도, 국민의 의식이 꾸준히 뒷받침돼야 한다.
‘아이 하나 더 키우기는 힘들어서’, ‘미혼이라 내 인생의 짐이 되는 게 싫어서’, ‘내가 성공하는데 육아는 걸림돌이니까’ 등 곤란하고 힘들다는 식의 변명으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 때다.
젊은 산부인과 의사들 ‘낙태근절 선언’ 내용과 의미
사라지는 태아들 …
임신부는 많지만 출산율은 바닥
의사·정부·국민 모두 낙태 방관하는 공범자
임신·출산·양육 지원이 여성 인권 향상 지름길
발행일2009-11-08 [제2671호, 11면]
▲ 청주교구 복음화연구소장 겸 교구연수원장 송열섭 신부(가운데),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박정우 신부와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근절운동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 2000년대 등장한 저출산 퇴치를 위한 포스터.
▲ 1980년대 등장한 산아제한 포스터.
▲ 〈 1970~2008년 출산율 추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