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문수학과 천학연구 및 교우관계
나이가 들면서 이벽 성조께서는 당시 탁월한 대학자 순암 안정복에게서 한동안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는, 이미 약 반세기 전부터 천주교 도리에 관한 한서들이 중국을 통하여 들어와 있었으나, 이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었을 뿐,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고, 또 대부분이 이를 학문적 지식의 대상으로만 여겨서, 좀 신기한 학설에 대한 공부로, 호기심을 채우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벽 성조께서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리의 깊은 참뜻을 음미하고, 종교적 신앙의 마음을 생동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열아홉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여 주는 동시에, 끝말을 쓰게 되었는데, ‘천학고’라는 논문을 지어서 거기에 내게 되었다.
더욱이, 중국에 와서 많은 서적을 낸, 서양의 마태오 리치의 저서들을 읽고 깨달아서, 그 천학도리를 항상 깊이 묵상하였다. 또 어떤 때, 친구들이 놀러 찾아오면, 술 마시기나 잡담을 피하고, 천지만물의 깊은 의미와 도리를 풀어 이야기해주고, 쉽게 알 수 있도록, 명쾌한 해설을 해주곤 하였다.
그 시절에 이벽 성조께서는, ‘하늘에 오르는 길(상천도)’이라는 글을 간결히 시문으로 지어서, 부근에 있는 봉선사라는 절의 춘파대라는 사당에 기증하여 걸게 하였다. 스물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던 청년학도들이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과 함께 어울리며,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니, 그 중에는 정약전, 이승훈, 권상문 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이벽 성조께서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일부를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연세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천주를 알고, 믿고, 공경하는 신앙인이었다.
특히 이벽 성조께서 밤낮으로 골똘히 읽고 연구하던 천학에 관한 서적들은, 바로 이벽 성조의 고조부 이경상공이 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이나 있다가 귀국할 때, 아담샬이라는 서양인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천주교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때 가지고 왔던 많은 책들 중에는 외국에서 가져 온 것으로서 가보로 대대로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고, 또 일부 서적은 그 당시에 바로 중국에 드나들던 홍대용 등이 나무상자로 사가지고 온 것이었고, 이벽 성조의 아버지를 거쳐서 쉽게 이벽 성조에까지 전달이 되었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조정에서는 물론, 일반 학자나 양반들도 천학서적을 읽는 것에 대해서 금하지 않았을 때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교 서적을 찾아서 손에 들어오는 대로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며 묵상하고 나서는 더 이상 의심나는 도리가 없을 정도로, 넓고 또 깊게 믿은 후에는, 세상 일들이 손에 걸리지 않아서, 큰 산들과 고요한 강가를 거닐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주를 그리워하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산수 좋은 곳을 두루 다니며, 북상과 기도를 즐기다가, 명산사찰에 이르러 도 닦는데 뜻을 둔 선비들이나, 학문에 열중한 면학자들을 만나면, 아주 시원스럽고, 정확하게, 우주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이신 상제에 관하여 논증해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제 이벽 성조 사후(1785년) 약 1세기 후에(1872년)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프랑스인 작가 샤를르 달레에게까지 전달되었던 이벽 성조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자.
“하느님의 섭리가 조선에 복음을 들여보내기 위하여 쓰신 주요한 연장은 이름을 벽이라고 하는 이덕조였다. 그는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고려조 때에 높은 벼슬을 한 그의 조상들 중에는,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과 가장 높은 관공직의 영광을 누린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2, 3대 전부터 이 집안은 무관직으로 전향하였고, 그 가족들은 중요한 무관직을 얻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으므로, 아버지는 나중에 그의 출세를 쉽게 만들 수 있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어려서부터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완강하게 거절하며, 죽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자라나면서 키가 크고 힘이 무척 센 사람이 되었다. 그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백근을 들 수 있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도 모든 이의 주목을 끌었으나,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빛났으며, 그의 언변은 기세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연구하여 파고들었으며, 그 나라의 경서를 배울 때에도, 어려서부터 문장 속에 숨은 신비스러운 뜻을 탐구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책들을 배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학문 습득을 지도하고 도와줄 만한 모든 학자들과 교제하였다. 그는 농담을 좋아하였고, 조선 예법의 복잡하고 세밀한 규칙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비록 이 나라에서 직업적 학자들을 구별하게 하는 어색한 점잖을 일부러 늘 빼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거지는 무엇인가 고상하고 위대한 기풍을 자연스럽게 풍기고 있었다.
▨ 천진암 강학회에서의 천학논증과 신앙수련
1779년 기해년 정조 삼년 음력 섣달, 양력으로 1780년 정월 중순 경이었다. 지금 이벽 성조 묏자리가 있는 천진암에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권일신 등과 함께 학문연구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학자 권철신이 강학회를 개최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벽 성조께서는 서울에서 일백여리 눈길을 걸으시어 엄동설한에 마재와 항금리를 거쳐, 강학회 주최자 권철신이 늘 거하던 앵자봉 동편 아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셨다. 그러나 강학회는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 밤으로 길을 떠나 눈으로 덮인 앵자산 마루를 넘으시어 한밤중 늦게서야 천진암에 이르셨고, 학자들을 만나시어 촛불을 밝히시고, 경서를 담론하셨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이벽 성조의 강론과 논증을 통하여 학자들은 유불선과 여러 경서에 담긴 도리를 하나하나 비교 연구 검토하여, 우주만물에는 조물주 천주 계심과, 사람에게는 불사불멸하는 영혼이 있고, 죽은 후에는 상선벌악을 하는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비롯하여,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였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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