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에 위치한 ‘용산’은 이제 미군기지, 호남선 기점, 전자상가 등으로 떠올려지는 수많은 이미지 속에 또 하나의 특별한 모습을 더하고 있다. 이른바 ‘참사 현장’이라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굴곡진 역사의 현장 가운데 어디라고 아픔이 없을까마는 용산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동시대인들이 한 시공간 안에서 생생하게 목도한 현실이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감상과 태도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버린 용산에 언뜻언뜻 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누구에게서 찾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제 그 뜨거움의 이미지는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또 다른 떨림을 전해주고 있다. 그 떨림을 찾아 그 떨림이 되고자 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왜 용산으로 갔을까. 그리고 또 다른 용산의 ‘현장’이 되고 있는가.
칼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용산의 천막에서 만난 이강서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는 따뜻한 눈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따뜻함이 지금껏 그를 지탱해온 힘인듯 싶었다. 그래서 그의 바람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이 신부가 대신한 외침은 소박했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큰 울림이 들어있었다.
겨울의 들머리, 기자가 찾은 날도 이강서 신부는 저녁에 있을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생명평화미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함께하시는 주님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습니다. 기도가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하는 원천인 것 같습니다.”
세간의 숱한 눈길을 의식한 듯 이 신부는 그간의 고충을 ‘주님의 숨결’과 ‘기도’란 말에 담아 털어놓았다. 지난 1월 20일 겨울바람과 함께 불어 닥친 화마에 6명이 스러져간 참사가 일어난 후 그 현장을 지켜오다시피 해온 이 신부는 다시 맞는 겨울 앞에 적잖은 감회가 서린 듯했다.
“저희들을 향한 부정적 의견이나 여러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에 수긍하지 못하던 이들까지도 힘을 보태오는 모습을 보며 지난 시간 기울여온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지난 3월부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중심이 돼 봉헌해온 생명평화미사나 각종 행사에 함께하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꾸준히 늘고 있는 게 그 방증이기도 하다.
사제단이 용산에 와있는 까닭을 묻는 물음에 이 신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며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서”라고 힘주어 말했다.
“성경은 강도 만난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 참다운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들려줄 뿐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봤을 때 2009년 한국 사회에서 도움을 청할 힘조차 없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우리 시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철거민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이 신부는 세간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시각들에 아픈 마음도 드러냈다.
“저희가 누굴 선동하거나 부추기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면 지금 이 시간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고민은 누가 이 시대의 참으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분명 그들 곁은 찾아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는 주님께서 어린양을 돌보셨던 것처럼 그들 가운데서 하느님 사랑을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이 통했을까, 신자가 한 사람도 없는 유가족들이지만 매일 미사가 기다려지고 미사 때면 누구보다 열심히 참례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사제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이 신부는 “순교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할 것이냐”는 물음을 되돌려주었다.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종교, 어떤 직위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에 따라 실존적 결단을 하는 문제입니다. 얼마만큼 하면 충분히 기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면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라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와 있음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참사 현장에서 많은 이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가장 아팠던 기억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복음적 시각’에서 해답을 찾았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다른 입장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적 시각이 아닌 세상의 눈, 경제적 눈으로만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인 양 말하는 것은 비복음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공적(公敵)으로까지 바라보는 듯한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 안팎의 시각에 적잖은 실망감을 털어놓았다.
“오로지 정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런 사람들을 모두 예비 범법자처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참담한 마음까지 듭니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도 당시로 봐서는 아웃사이더이셨습니다.”
이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을 향한 편협한 시각의 뿌리를 ‘가난의 영성’을 잃은 데서 찾았다.
“가난의 영성은 자신을 끝없이 비우고, 낮추고, 작아지는 길을 택함으로써 그것이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자발적 가난이야말로 우리를 가난의 영성으로 이끌어줍니다. 교회가 중산층화되어 간다고 하지만 가난한 마음만은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을 잃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이 신부의 목소리에 조금씩 떨림이 실렸다. 눌러 왔던 생각들이 조금씩 고개는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참사가 일어난 지 300일이 되고 계절이 네 번 바뀌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 있는 사과 한마디 없는 이 모습이 과연 이성적이고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커다란 부조리는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눈에 띈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한 번이라도 참사 현장에 발걸음을 한 1000명이 넘는 신부들, 그들은 우리 시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나그네 된 이들을 찾고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프지만 한국교회가 용산 문제를 통해 큰 도전을 받으며 은총의 시기를 겪고 있다고 봅니다. 용산이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이 정화되고 우리 시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을 짚어낼 수 있는 장소가 되길 기대합니다.”
■ 용산 관련 교회 활동들
온갖 고초 속 평화미사 꾸준히 봉헌
▶1월 20일 : 용산 참사 발생
▶1월 22일 :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용산 참사 관련 성명서 ‘경악과 탄식, 용산 살인진압 사태’ 발표
▶1월 31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참사 현장에서 촛불 평화미사 봉헌
▶2월 5일 :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용산 철거민 희생자 추모와 책임자 처벌 촉구’ 입장 발표
▶2월 13일 : 전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및 정의구현사제단, 전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용산 참사 희생자 추모미사’ 봉헌
▶3월 28일 : 용산 참사 현장에서 매일 저녁 7시에 미사 봉헌하기 시작
▶4월 12일 :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용산 현장에서 예수부활대축일 미사 봉헌
▶5월 25일 : 용산 참사 유가족, 서울대교구청 방문 김운회 주교(서울대교구 사회사목 담당) 면담
▶6월 3일 : 서울대교구 김운회 주교, 참사 현장 방문 유가족 위로
▶6월 15일 : 전국 각 교구 사제와 수도 사제, ‘한국천주교 사제 1178인 시국선언문’ 발표
▶6월 20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 용산 참사 5개월 추모대회 중 경찰과 대치하다 실신
▶6월 21일 : 이강서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 현수막 강제 철거하는 경찰에 항의하다 폭행당해 부상
▶6월 22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용산 참사 현장에서 전국사제시국기도회 시작
▶6월 28일 : 프란치스칸 가족 수도회 수도자 344명 시국선언문 발표, 용산 문제 조속한 해결 촉구
▶7월 15일 :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참사 현장에서 평화미사 봉헌
▶7월 20일 : 참사 반년 맞아 용산에서 추모미사 봉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용산 문제 해결 촉구 입장 발표
▶9월 7일 : 윤창호 신부(청주교구), 청주에서부터 일주일간 걸어 용산 참사 현장 방문
▶10월 12일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시국기도회 및 미사 봉헌. 전종훈 신부, 참사 문제 해결 촉구하며 삭발 및 단식
▶10월 22일 : 문규현 신부(전주교구), 용산 참사 진상 규명 촉구 단식기도(단식 10일째) 중 실신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짐
▶11월 2일 :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전국사제 시국미사 봉헌, 제4차 천주교전국사제 시국선언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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