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네 번째 서한에 대하여
열네 번째 서한에서도 최양업은 조선시대의 사회구조 가운데 양반제도에 대해 강조한다. 또 선종한 페레올 주교의 사목이 당시 조선 신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한 최양업의 생각과 이야기도 흥미롭다.
최양업은 특히 이 서한에서 페낭에 있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서한을 보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서한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최양업 신부의 서한은 20통이 넘는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불무골에서, 1857년 9월 15일
열네 번째 서한 역시 불무골에서 작성됐으며, 이전 서한(1857년 9월 14일)을 작성한 다음날 쓴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열세 번째 서한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열네 번째 서한은 리브와 신부에게 쓴 것이다.
최양업은 이 서한에서 다블뤼 주교가 조선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한다. 또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 신학교 교장이 됐으며, 페롱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는데, 매스트르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자신만이 베르뇌 주교를 도와 사목에 열중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서한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양업이 베르뇌 주교의 선임 페레올 주교의 사목방안에 대해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리브와 신부가 이런 것을 알아야 다음 일을 처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조언한다.
“페레올 고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교우들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최양업은 페레올 주교가 그들만 사랑하고 신임해 모든 일을 그들과 논의했으므로 그들을 내보내라고 진언했지만 꾸중만 들었다고 전한다.
최양업의 이러한 고백은 당시 주교와의 관계,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사제와 평신도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의 역할을 한다.
페레올 주교가 양반계급만을 편애해 비참하고 억눌려있는 일반 서민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양업의 말에 따르면, 신자들은 그로 인해 불화가 심해지고 자포자기에 빠졌다고 한다.
여러 서한들에 따르면, 최양업은 시대의 사회구조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고심하며 ‘약자’인 서민들의 편에 섰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 사람들이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 길을 잘 파악하므로 동일한 이론으로 백성들을 계몽하자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높은 벼슬에 사람을 등용할 때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 평가해 등용한다면 양반제도는 강제적 노력이 없더라도 저절로 쉽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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