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제는 존재론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되었고(1코린 12,13로마 6,4-5「교회헌장」7항), 또 성품성사로 축성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으며, 성체를 받아 모실 때 마다 예수님과 하나로 결합된다(1코린 10,1712,12「교회헌장」7항).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제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처지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될 때까지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갈라 4,19).
존재론적인 일치란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씨앗을 우리 몸에 받는 것과 같다. 이 씨앗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제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을 것이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일치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 일치의 꽃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이고,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변형되어 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존재론적인 일치란 사제는 본래 거룩한 사람이고, 하느님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이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의미는 영성생활 중에도 가장 높은 경지인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의 의지와 사제의 의지가 하나로 합쳐져 서로 상반됨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완덕에 도달하였을 때, 거룩하게 성화되었을 때만 이루어진다.
사제는 모두 완덕에 불린 사람들이다. 사제는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제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를 게을리하면 사제 본연의 직무에 게으른 사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완덕에 오른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데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한평생 하느님의 일은 하지 않고 헛일만 하다 갈 것인가?
완덕에 오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먼저 사제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거룩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나마 완덕에 오를 수 있는 희망이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면’ 될 것이라고, 간단하지만 명료한 방법도 제시되어 있다.
* 이 글은 가톨릭대 출판부의 「신학과 사상」 44호(2003년 여름)에 실린 김기화 신부의 ‘현대사제의 영성’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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