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신자 학자들의 교리토론회 승리
이가환은 품위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그 조상들 중에는 고명한 학자가 여럿 있었고, 그 자신도 아직 젊기는 하나 평판이 높았다. 천주교가 빨리 전파된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말하였다.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
드디어 토론할 날짜를 정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 굉장한 토론에 참관하려고 이벽 성조의 집에 모였다. 이가환은 먼저 이벽 성조에게, 그가 오류라고 부르는 것을 버리고 돌아오게 하려고 해 보았다. 이가환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지적되고 반박되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세밀한 점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의 논리의 건축을 모두 파괴하고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가환은 그의 논거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온 힘을 기울였으나 헛일이었으니, 이벽 성조의 논리는 언제나 전후가 일치하여 그가 제시하고 증명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벽 성조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하여 사방에 빛을 던져 주었으며, 그의 논쟁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처럼 끊어냈다. 천주교 신앙은 이 탁월한 무대에서 승리하였다. 그것은 마음이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많이 사로잡았으며, 새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이벽 성조의 논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하기 위하여 하루로는 넉넉지 못하였다. 토론은 사흘 동안 거듭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는 새 교리의 단단함과 아름다움을 점점 더 그러내는 결과밖에 가져 오지 않았다.
마침내, 완전히 패배한 이가환은 내놓을 만한 구실이 없어졌으므로, 다음과 같은 기억될 만한 말을 하였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가환은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는 다시는 입을 벌리지 않고, 그것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벽 성조께서는 그가 얻은 영광을 이용하여 새 입교자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새로운 적이 또 하나 나타났다. 이기양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자기가 전하는 진리에 자신이 있는지라, 그런 토론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기원과, 우주 각 방면의 아름다운 질서와, 하느님 섭리의 증거를 전개하였다. 그는 사람 영혼의 본성과 그 여러 자기 기능이며, 이 세상에서의 각자의 행실과 후세의 상벌과 기묘한 조화 등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끝으로 천주교 교리의 진리는 공격할 수 없는 원리에 의거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낼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믿는 듯하였으나, 솔직하게 그렇다고 시인할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가 물러간 뒤, 그 두 학자에 대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 두 이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은 천주교를 믿을 뜻은 조금도 없으니, 아무런 희망도 없다.”
▨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기초를 다지다
그러나 이벽 성조께서는 자기 나라에 복음을 빨리 전파하고 천주교회를 튼튼하게 세워 놓기 위하여, 학식과 평판으로 존경을 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인물들을 몇 명 끌어들여, 그 지주로 삼을 생각을 하였다. 이제는 위에 말한 두 사람에게는 기대를 걸지 않고, 전에 좋은 심정을 보인 일이 있는 양근 권씨 가문으로 눈을 돌렸다.
고려 시대부터 명성 높던 이 가문은, 왕조가 바뀔 때 가장 먼저 새 임금에게 가담한 가문 중 하나였으므로, 그 명망은 커갈 뿐이었다. 호를 녹암이라고 하는 권철신은 처음에 이야기가 나온 바 있는, 절에서 열렸던 연구회의 주창자로서, 그때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하나이고, 그 연구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형제 중 맏이였는데, 5형제는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제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벽 성조께서는 이 학자들을 입교시켜, 천주교의 전파자와 지지자로 삼는 것이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같은 해 갑진년(1784) 9월에 그는 양근 고을 감산에 있는 권씨 집으로 갔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종교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 진리가 환하게 빛났다. 50세쯤 된 맏이 철신은 중국 경서의 철학과 논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낸지라,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는 복음의 광명에 저항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 명망을 높여 준 거창한 일의 모든 결과를 한순간에 잃을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얼마 후에야 천주교에 입교하여 암브로시오라는 본명으로 성세를 받았다. 그의 항구한 신앙과 거룩한 생애는 이 다음 우리가 볼 것처럼 그에게 훌륭한 화관을 장만하여 주었다. 그런데, 셋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의 비상한 열심과 격식을 갖춘 열성은 이벽 성조의 희망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증명하였다.
그는 자기가 신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자기 친구와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 성공은 그의 명성, 학식, 덕행의 권위로 확보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노력을 크게 축복하시어, 양근 고을이 당연히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으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세 사람, 즉 요한세자 이벽 성조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들이 개척한 고상한 길로 보조일치하게 나아가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동포들의 눈에 신앙의 광경을 비추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때까지는 복음 전파가 공공연하게 별 지장 없이 행하여졌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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