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쇠로 만든 잔’이 좀 깨지고, 찌그러지고, 색이 변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놋쇠로 된 잔’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듯이 사제가 비록 좀 깨지고 찌그러지고 퇴색되었더라도 사제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있어 거룩한 사람이다.
이 부르심은 본래 거룩한 사람에게 거룩하게 되라고 하는 것이니 무리한 부르심도, 요청도 아니다. 단지 사제가 거룩한 자신의 모습을 망각하고, 거룩하다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며, 나에게는 아니고 다른 사제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며, 겸손이 아닌 현실적으로 사제의 본 모습을 외면하는 것이 문제라고 여겨진다. 즉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고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비록 내가 사제이지만 하느님과의 일치에 불린 것 같지 않다며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는 사제는 아마도 수동적 일치와 수덕 생활을 통한 능동적 일치(완덕)와 혼동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몇몇 사제만 완덕에 불렸다면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며 살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는 예수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든 사람이 거룩함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제도 당연히 거룩함과 완덕에 불리었고 특히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하여 완덕으로 초대된 사람이다.
완덕이란 하느님과 아주 친숙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즉 가난하시고, 순결하시며,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덕이란 모든 영혼을 남김없이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사제는 스스로 완덕을 추구하면서 다른 형제자매들도 이 삶으로 초대하고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형제자매들을 완덕의 삶으로 초대하는 특은은 하느님께서 사제에게 주신 또 하나의 사랑이다.
완덕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사제는 당연히 기도하는 사제가 될 것이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만난 체험을 바탕으로 강론을 잘 준비하는 사제가 될 것이며, 섬기는 사제, 성실하게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가 될 것이다. 이처럼 사제의 성덕은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줄 것이다(「사제직무교령」12항「현대의 사제양성」24,25항).
* 이 글은 가톨릭대 출판부의 「신학과 사상」 44호(2003년 여름)에 실린 김기화 신부의 ‘현대사제의 영성’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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