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천주교회가 최초로 겪는 을사박해와 이벽 성조의 장렬한 최후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 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은, 명례방 김범우 선생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시고, 안사랑 상좌에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사우 거사 권일신, 그 아들 권상문, 천재적인 두뇌와 박학한 학자이던 정약용과 그 형들인 정약종과 정약전, 그 외에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김범우, 이총억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 추조금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중인 계급인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집안의 신분을 가진 학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양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아가서, 자신들도 모두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니, 김범우에게 내리는 벌을 똑같이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사실 당시 사회 관습으로 볼 때, 이 여러 양반집 학자들을 함께 벌한다는 것은 매우 난처한 일이고, 또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양반집안 출신의 문중에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양반은 함부로 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만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리면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양반들을 벌하고 골탕먹이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미 양반집 문중마다 종친회, 즉 문중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문중회의가 열리지 않은 양반집들에서는, 천학을 규탄하는 통문이 서울에 돌려지기 시작하였고, 이 통문을 서울의 4대문 안과 문 밖, 그리고 강상 지역과 강하 지역의 여러 대감집들과 양반집들에게 돌리는 책임자들이 따로 정해졌을 정도이니, 그때의 상황은 대단한 것이었다.
통문이란, 오늘의 신문과 유사한 것으로서, 소식을 전달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수단의 순회서한의 일종이었다. 그 당시 돌렸던, 통문의 내용과 그 통문을 돌리던 각 지역 담당자들의 명부가, 천주교 박해자들이 기록한 책에 지금까지 남아서 전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심했던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승훈 선생의 문중인 평창 이씨 종친회가 열려서,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끌려가, 집안의 어른들 앞에서 무안과 봉변을 당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라주 정씨 문중회의에 소환되어 가서, 역시 문책을 당하였다. 안동 권씨네와 경주 이씨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승훈과 정약용은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고 나서, 집안의 큰집 작은집을 돌아다니며, 집안에 소란을 끼친데 대하여 사과하였다. 이것은 배교가 아니고, 단순한 사과이다. 그 당시로서는 본인들이나 또는 문중 원로들 간에나 아직 서로가 배교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다만, 집안에 사문난적이 태어나서 집안망신을 시키고 있다고 야단하는 원로들 앞에 가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더불어, 집안 어른들을 걱정시켜드렸으니 용서하라는,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경주 이씨 문중회의가 가장 혹심한 반발과 무서운 질투로 충만하였다.
그 이유는, 이벽 성조의 형님과 동생이 무과에 급제하여, 모두 장군 벼슬에 있었고, 또 이벽 성조의 인품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학식이 출중하여, 모든 선비들이 천학도사로 존경하였으며, 서울 장안에서 나이가 이벽 성조보다 18세 이상씩 더 먹은 당대의 저명한 원로 대학자들과의 천학토론에서, 명쾌한 승리를 계속 거둠으로써, 명망이 드높았는데, 친척들 중에는 이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심을 갖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주 이씨 문중회의에서는, 강경한 반대자들이, 자기네 경주 이씨들이 서울 장안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그 이유는 경주 이씨인 이벽 성조께서 천학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부모에서 제사드리지 말라, 남녀가 7세가 되면 한자리에 앉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반집 부녀자들이 남정네들과 동석하니, 이는 오랑캐의 법도이므로, 양반을 상놈으로 만들고, 상놈을 양반으로 만드는 이러한 불법을 가르치는 사문난적은 당장 경주 이씨 문중에서 제명처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장군은, 문중회의에 번번이 불려가서, 수치스러운 모욕과 문책을 당하였다. 아들 이벽 성조의 천학운동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아예 족보를 빼어버릴 터이니, 어디에 가서나, 경주 이씨로 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에서 상놈이 되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는 것이었다.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공은, 가뜩이나 성격이 괄괄하고 쉽게 격분하는 무관이었으며, 체면과 위신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 양반들은 모두가 그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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