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생애를 건 기다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 그리움은 그칠 줄을 모른다. 달그락거리는 아침밥 짓는 소리도, 빨리 일어나라는 잔소리도 그립다. 시장에서 함께 장을 보다 잠시 분식집에 멈춰 군것질도 하고 싶고, 휴일이면 목욕탕에 가 등을 밀어주며 소소한 대화를 하고 싶다. 11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속으로만 부르는 그 이름 ‘엄마’.
스물다섯의 백선희(가명·글라라·25)씨에게 ‘엄마’는 오랜 그리움이자 기다림이며, 그리고 ‘희망’이다.
“엄마는 지금 청주여자교도소에서 14년째 복역 중이세요. 늘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고, 노름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집에 불을 질러 다 같이 죽자고 덤비던 아빠로부터 저희를 구하시려다 그만….”
‘엄마’는 ‘아빠’를 죽였다. 아들과 딸을 아버지로부터 구하려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1살 선희씨의 곁을 떠났다.
“처음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몇 년이 지나 중학생이 되고나서도 한참동안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자고 일어나면 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잠을 청하곤 했어요. 그러다 지쳐 그 어린나이에 죽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떠난 후 할머니 손에 자란 선희씨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며느리를 닮았다’는 이유로 구박데기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바랄 것이라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나올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출소’였다. 그 기다림을 붙잡고 오늘을 살았고 내일을 기다렸다. 언제나 혼자였다. 혼자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방황하는 오빠와 차가운 할머니의 시선 속에서 선희씨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기에 혼자 일어서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엄마와 함께 다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미쳤다. 기다림에서 희망을 찾은 것이다.
“저에게 유일한 꿈이 있었다면, 그건 출소한 엄마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거였어요. 엄마가 나왔을 때 함께 살 월세방이라도 마련해 놓는 것이 제 꿈이었어요.”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선희씨는 막내삼촌의 도움으로 뒤늦게 미술학원에 다니게 됐고, 서울 소재 한 미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하면서 할머니의 집을 떠났다.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집을 구하고 살림을 꾸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가장 추웠던 그 시절, 하느님을 만났다.
“여러 사정으로 갈 곳이 없던 제가 교정사목위원회 로제 수녀님의 도움으로 한 교우분의 집에서 지내게 됐는데, 그분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됐어요. 하느님을 만나고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대화하고 있던 상대가 바로 하느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선희씨는 하느님을 몰랐지만 언제나 그분께 의지하고 있었고, 그분 안에 생활하고 있었기에 모든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했다.
“저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힘이 돼 주시는 분, 고통을 통해 나를 성장하게 하시고, 기다림을 통해 희망을 꿈꾸게 하시는 분이에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선 선희씨가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언젠간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겠죠? 14년이란 세월도 기다렸는데,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어요. 엄마! 난 이제 엄마가 떠났을 때 울고만 있던 초등학교 4학년 꼬마가 아니에요. 이제 지난 세월은 모두 잊어버리고 아무 걱정 마세요. 이제 어른이 된 제가 엄마를 지켜드릴게요. 엄마가 바로 ‘나의 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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