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국권침탈 100년, 한국전쟁 60년을 맞는 해가 열렸다. 그 아픔,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평화를 말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염원하며 그 아픔의 현장을 찾았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날, 그곳에서 허리가 반으로 잘려 나간 한반도, 한민족, 사제, 젊은 신앙인을 만났다.
강원도 철원. 옆을 지나가는 차가 점점 줄어든다. 한적한 시골길. 승용차는 점점 드물어지고, 군용 지프가 어느새 많아졌다. 대한민국 국방의 최전선이 다가오고 있다.
오후 1시. 군종교구 청성성당에 들어섰다. 주임 안종배 신부가 반갑게 맞는다. 칼바람이 얼굴을 찌른다. 영하 16도, 체감 기온은 영하 20도를 훨씬 넘는다. 안 신부의 한마디가 괜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철책선 쪽으로 가면 여기보다 훨씬 추워요. 옷 단단히 입으셨죠?”
입구부터 위병들의 눈빛이 매섭다. 몇 번의 신분 확인 절차를 마치고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차 안의 내비게이션이 길을 잃는다. 화면 위에 차 모양 그림만 둥둥 떠 있다. 최전방에 왔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철원 지역은 예전부터 유명한 곡창지대로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피의 능선, 백마고지 등 전쟁에서 유래돼 지금까지 이어내려오는 지명이 이곳이 얼마나 치열한 현장이었는지를 말해준다. 피의 능선에서만 우리군 1만 5000여 명, 중공군 3만여 명이 전사했다.
차는 인가(人家) 없는 비포장도로를 계속 달렸다. 차가 지나는 옆으로 보이는 논밭에 흰두루미와 재두루미 3쌍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평소에는 북한 땅에서 살다가 겨울이 되면 넘어와 여기서 새끼를 낳는단다. 흔하게 볼 수 없는 독수리도 보였다. 자유로워서 부러웠다. 적어도 새들에게는 철책선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철새와 야생동물은 이곳 특유의 묵직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순수함 그 자체로 다가왔다. 서로 각을 세우고 대립하는 이 공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 어쩌면 이들은 또 다른 의미의 희망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 신부가 말했다. “저기 앞쪽에 철책선 보이시죠? 저 너머는 모두 북한 땅입니다.”
눈이 멈춘 그곳에 철책이 길게 늘어서 있다. 겨울이라 벌거벗은 민둥산 밑으로 차가운 철책선이 걸려있는 그 모습에서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북녘이 지척이라지만 눈으로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병사들이 생활하고 있는 생활관(내무반)으로 곧장 향했다. 양진석(베드로·23) 상병을 만나 일상을 들어봤다.
“무기에 녹이 슬지 않도록 늘 총·포를 닦고,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추위는 최대의 적이다. 철원은 기상예보 중에서도 최저기온을 예로들 때 자주 등장하는 지역. 철원의 영하 기온과 칼바람은 가만히 서있으면 발가락이 한데 붙어버릴 것만 같은 추위다. 야간근무의 추위는 더더욱 심하다.
“겨울이 오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가족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러나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킨다는 보람을 가지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 중 1%에 선택돼 이곳 GOP에 와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GOP(general outpost, 일반전초), 군사한계선에서의 근무는 전체 복무 기간 중 1년이다. 늘 긴장 속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에게 부대 가까이 성당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희망이 된다. 안 신부는 철책선을 오가며 장병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희로애락 속에 녹아든다. 병사들은 안 신부를 통해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도 숨을 고를 수 있다. 병사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안 신부의 무기는 이해와 배려다. 차돌(안젤로·28) 대위는 “GOP 전선의 책임을 맡고 있다는 점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하지만 신앙 생활이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장병들과 함께 GOP 초소에 도착했다. 가파른 초소 사다리에 오르니 철책 너머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허공에 대고 손을 뻗어 바람이나마 움켜쥔다. 주변은 조용할 뿐, 철책 너머 북한 저편은 아무 소리도 인기척도 없다. 조용하다. 하지만 편안한 고요가 아니다. 언제 무엇인가가 터질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의 웅크림, 그것이었다.
순간 침묵을 깨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철책선 맞은편에 멧돼지 한 마리가 등장했다. 왔다 갔다 하더니 아예 배를 깔고 드러누워 태평스럽게 잠을 잔다. 세상 걱정 하나 없는 듯 쿨쿨댄다. 그 모습에 삭막했던 분위기가 환해졌다.
이 와중에도 병사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갖고 있던 총을 들고 철책선 앞에 선다. 철책선을 조심스레 흔들며 걷는다. 훼손된 부분이 없나 살핀다. 눈매가 매섭다. 특별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계 중 이상무.
이 땅의 선배들이 그 길을 걸었고, 오늘은 이들이 추위 속에서 그 길을 또 걷는다. 지난 6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일이다. 똑같은 하루들이 그렇게 흘러 60년이다.
철책선을 뒤에 하고 돌아오는 길, 청성성당에 차를 멈췄다. 성당 안에선 군종병이 구유를 매만지고 있다. 긴장과 추위가 엄습한 이곳에도 희망의 주님께서 오셨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세월에 사라져 가고, 오늘 철책선을 지키는 젊은이들도 1년 후 2년 후에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 기간이 우리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분명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는 아니다.
철책선은 칼바람 속에서 말했다. 엉켜있는 매듭을 이제는 풀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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