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대구로 돌아온 드망즈 주교는 곧바로 성탄절을 보내고 1912년을 맞는다. 드망즈 주교는 1911년 성탄절과 12월 31일에도 꼼꼼히 일기를 썼다.
일기의 내용은 피정을 위한 장소가 전혀 없는 등 시설이 부족하다는 것과 대구교구가 탄생한 지 반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1911년 일기의 마지막에는 드망즈 주교의 염려와 희망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대구교구가 탄생한 지 반년이 되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미래는 그분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젊은 주교는 경험을 시작했다.”
1912년 1월 5일
경상도 지방 사목방문을 시작했다. 오늘 아침 김 요셉 신부와 함께 영천으로 떠났고, 무세 신부와 줄리앙 신부가 10리 길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쾌적한 50리를 말을 타고 여행한 후 우리는 하양의 한 교우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상당히 멀리서부터 많은 사람의 행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식사 후 교우들은 바깥 천막에서 조명과 연설 등을 겸한 학교 축제를 마련했다.
1월 9~11일
오후 12시50분 열차 편으로 밤이 되기 조금 전 마산포에 도착했다. 훌륭한 환영이 있었다. 저녁때는 조명과 학교 축제, 그러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때문에 밖에서 오래 있지 못했다.
다음날 방문에 따른 일상적인 일 외에 나는 학교(로베르 신부가 해성제를 폐지하고 1908년 세운 성립학교를 말한다, 지금의 효성학교)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학교는 존폐위기에 처해 있으나 적어도 얼마 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의 아주 큰 선의가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다. 장소가 학교에 적합하지 않다. 본당은 선교사의 편의를 위해서는 아주 위치가 좋지만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작은 마을이어서 아주 나쁘다.
이전에는 여기에 학교를 건설하려는 열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읍내 아이들은 그들이 쉽게 갈 수 있는 읍내 학교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빚을 지지 않도록 교구의 규정을 마련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잘못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1월 12일
카넬 신부와 나는 오늘 아침에 마산포를 떠났다. 추위는 아주 심했고, 여러 번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마산포에서 소촌(경남 진주시 문산면 소문리, 문산본당이 있던 마을)까지 이르는 120리에 일본인이 만든 새 도로를 따라갔다.
도중에 점식식사를 하기 위해 멈추기도 했다. 거기서 또 15리 떨어진 곳으로 종부성사를 주러 가야만 했고, 우리가 소촌에서 20리 떨어진 곳에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 김 베드로 신부를 만났을 때는 이미 밤이 됐다.
횃불을 가지고 온 학생들이 이 긴 하루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밝게 비추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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