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16만 다문화가정이 한국에 둥지를 틀고 있다. 불어나는 다문화가정과 함께 다문화가정 아이들도 태어났다. 1990년대 말 갓 태어나 이제 초등학교 5~6학년, 혹은 중학생이 된 8만8000여 명(2009년 8월 행정안전부 통계자료)의 다문화가정 아이들,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 우는 엄마, 말 못하는 아이들
전화벨이 울렸다.
“수녀님, 남편이 술 먹고 배를 차요. 아파요. 시어머니가 ‘너 돈 주고 사왔다’고 해요. 아기에게 한국말만 하라고 하는데 나는 한국말을 잘 몰라요. 이혼하고 싶은데 갈 곳이 없어요.”
전화기 너머 흐느끼는 베트남 이주여성의 울음소리에 권오희 수녀(서울 베들레헴 어린이집 책임자·살레시오 수녀회)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가정의 아이는 생후 23개월.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때, 엄마는 남편에게 맞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당하며 울고 있다. 시어머니의 ‘모국어사용금지령’ 때문에 엄마는 태중의 아이에게도, 태어난 아이에게도 제대로 말을 걸지 못한다. 한국어가 서툰 엄마가 할 수 있는 말은 ‘하지마!’ ‘먹지마!’ ‘안돼!’ 지시어뿐이다.
아이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다. 엄마와 교감하고 싶지만, 엄마는 말이 없다. 권 수녀가 모 교수진의 다문화가정 아이들 실태 조사결과를 예로 들며 말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언어발달 장애를 갖고 있다는 조사결과는 당연한 것입니다.”
# 수녀님, 실로폰이 뭐예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초등학교 4학년 아이 하나가 달려와 수녀님께 ‘실로폰’이 뭐냐고 묻는다. ‘다음 식을 구하시오’라는 수학문제에서 ‘식’이 무슨 뜻인지 몰라 문제를 풀지 못한다. ‘실로폰’이 무엇인지, ‘식’이란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무지의 상태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수많은 가능성과 함께 정체한다.
언어발달 장애를 겪고 있는 대부분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어휘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력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지적수준에는 문제가 없다. 권 수녀는 “우리 집에 있는 36개월 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지적능력검사를 했는데 최우수 수준인 아이도 있다”고 말했다. 이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건강하게 자란다면, 두 나라 언어와 문화에 통달한 훌륭한 국제적 자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권 수녀는 이 아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아무 준비 없이 아이들을 일반 어린이집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아이들에게 오히려 더 좋지 않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있습니다.”
# 오늘도 당당하게!
서울 성북동 베들레헴 어린이집에서 자라고 있는 서른여섯 명의 아이들은 ‘복 받은 아이들’이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거나, 가정이 해체돼 어린이집으로 온 이 아이들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영성적인 면까지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오늘도 당당하게!’를 외치며 학교 혹은 유치원으로 향한다. 권 수녀는 “6~7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타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사회경험을 미리 해 보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초등학교 아이들 교육은 ‘공부’와 ‘체험학습’에 중점을 둔다. ‘1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누적격차를 줄여, 이들이 올바른 일꾼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다. 이 아이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둘러앉아 성경이야기를 듣고 하루 일과를 나누며 내일을 준비한다. 신앙생활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또 내 엄마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고, 항상 당당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아이들도 역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고 갈 재목이란 걸 기억해야 합니다.”
# 원숭이가 다섯 마리~!
매주 금요일은 베들레헴 어린이집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러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15일 금요일 저녁, 엄마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는 기태(5)를 무릎에 앉혔다.
‘아가야, 울음을 그치렴. 엄마가 곧 오실거야.’
동화책을 펴들자 아이들이 하나둘 곁으로 모여들었다.
“자, 여기 원숭이 다섯 마리가 뛰어가고 있네요? 원숭이가 몇 마리라고요?”
“원숭이가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원숭이 다섯 마리가 뛰어갑니다!” 숫자를 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방 안에서 구구단을 외우던 언니 오빠들도 나왔다. 베들레헴 어린이집에 원숭이 숫자세기 놀이가 시작됐다.
“원숭이가 하나, 두울, 세엣….”
너희들의 힘찬 목소리에 대한민국의 미래도 담겨있는 거라고,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듯 한 걸음씩 우리 함께 가자고,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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