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신앙
항상 조용하다. 김운회 주교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다. 어디를 가든 요란하게 소문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신자들 삶의 자리 곳곳에 있었다. 특유의 겸손함과 온화한 미소로 임하는 낮은 자리마다 온유와 사랑이 꽃피게 했다.
신임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그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람들은 그를 두고 ‘따듯한 목자’, ‘사랑이 많은 목자’라고 입을 모은다. 2002년 주교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담당 대리로 지내온 지난 8년의 시간은, 그의 따듯하고 온화하면서도 섬세한 성품을 엿보게 한다.
2009년 한 해 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용산참사 유가족 다섯 명이 김 주교를 찾아와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이자, “생명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서 기도를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열흘도 되지 않아 현장으로 달려가 유가족들과 함께 찬 길바닥에 앉아 그들과 아픔을 나눴다.
그는 영등포 쪽방에도 찾아갔다.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방에서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이들의 모습에 김 주교는 “충격을 받았고 수단을 입고 있는 자신이 죄스러웠다”고 회고했다. 2층으로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사다리에 끌리는 수단 옷자락이 너무 화려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랬다. 가난한 이, 고통 받는 이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도 부족해, 온전히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에까지 마음을 썼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다고 했다. 그들의 아픔을 볼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임무를 주셨음이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삶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을 찾는 그의 신심은 5대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뿌리 깊은 신앙에서 비롯한다. 그의 고조부인 김기호(요한) 옹은 한국 교회의 토대를 닦는데 특별한 기여를 한 ‘한국의 바오로 사도’로 불린다. 병인박해 당시 황해도에서 전교회장과 명도회장(전국 평신도 총회장)을 지낸 김기호 옹은 리델, 블랑, 뮈텔 세 주교를 보필하며 한국교회 초석을 다졌다.
2001년 선종한 부친 김재환(바오로) 선생 역시 김기호 옹을 이어 평신도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서울 대방동본당 기성회 회장을 지내며 오늘날 대방동본당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썼고 서울대교구 은퇴신부 후원회 고문을 지내면서 사제들의 삶을 보좌하기도 한 것이다.
2008년 선종한 모친 황옥남(마리아) 여사 역시 신앙심이 남달랐다. 선종하기 10개월 전, 무료급식소 ‘베들레헴의 집’에 머무는 행려인들이 따듯한 겨울을 나길 바란다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7억 원 상당의 건물 모두를 봉헌했다. 한 사제의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은 사랑의 실천가이기도 했다. 김 주교는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한 번도 사제가 되라 하신 적은 없지만, 삶으로써 성소의 길을 열어주셨다”며 신앙 선조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북지방에서 성서번역 등 신자교육에 공헌했던 고조부 김기호 옹의 정성이나, 전 재산을 소외된 이웃에게 봉헌한 모친 황옥남 여사의 은덕 때문일까. 1973년 사제품을 받은 김 주교는 선조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서울 방배동본당과 발산동본당 주임 시절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활동을 특수사목, 그중에서도 청소년·교육 분야에서 헌신한 것이다. 특히 동성중 교사와 동성고 교장으로 재직했던 시절은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이력이다. 동성중 교사로 지내다 본당으로 발령받아 송별미사를 봉헌하던 때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눈물로 미사를 봉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서 사회사목을 담당하며 소외된 사각지대 곳곳을 살폈다.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사형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가하면, 지적장애인들에게 손수 견진을 주고 한 사람 한 사람과 기념촬영을 하며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어렵게 탈북해 사선을 넘어온 새터민들을 하나원에서 만나 일일이 손을 잡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의탁하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며 비무장지대 안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화합 대미사’를 여는 등 대북선교 기틀을 다지는데도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이렇듯 곁에 있는 이웃에서부터 죽음을 예고 받은 사형수, 새터민, 눈에 보이지 않는 북한 동포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했던 김 주교의 세심함은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공고로 진학해야 했던 가난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가난했었기에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그래서 아픈 이들의 고통을 함께할 줄 아는 넓은 그릇이 된 김운회 주교.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또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 사제로 남고 싶다”며 겸손과 영성을 드러냈던 김 주교의 온유의 향기가 이제 춘천교구로 향한다.
약력
▲1944년 10월 18일 서울 출생 ▲62년 2월 서울 공업고등학교 졸업 ▲72년 2월 가톨릭대학교 졸업 ▲73년 12월 사제 수품 ▲73년 12월~82년 3월 동성중학교 교사 ▲75년 5월 서울대교구 교리사목위원회 중고등학생 담당 ▲77년 12월 사목연수원 중고등학생 담당 ▲80년 6월~82년 6월 서울대교구 성소위원회 위원 ▲80년 9월 서울대교구 교육위원회 위원 ▲82년 3월~88년 9월 서울대교구 방배동본당 주임 ▲88년 9월~89년 2월 서울대교구 발산동본당 주임 ▲89년 2월~92년 10월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90년 11월~94년 2월 서울대교구 성직자교육위원회 위원 ▲90년 11월~92년 10월 서울대교구 성소위원회 총무 ▲92년 10월~95년 9월 서울대교구 교육국장 겸 초중고주일학교교사연합회 지도 ▲92년 10월~95년 9월 서울대교구 참사위원 ▲94년 2월~95년 9월 서울대교구 사제평생교육위원회 위원 ▲95년 9월~2002년 11월 동성고등학교 교장 ▲2002년 10월 12일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임명 ▲2002년 11월 21일 주교 수품 ▲2002년 11월~현재 사회복지법인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이사장·재단법인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이사장·사단법인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이사장·사단법인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이사장·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이사·재단법인 평화방송 이사·재단법인 서울가톨릭 청소년회 이사·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주교회의 선교사목주교위원회 위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서울대교구 동서울지역 교구장 대리·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부위원장·사회복지법인 환주복지재단 이사 ▲2010년 1월 28일 춘천교구장 겸 함흥교구장 서리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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