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사형제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림에 따라 수많은 논란 속에서도 사형은 제도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 가운데서도 사실상 위헌 의견을 피력한 재판관들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국가가 함부로 사형집행을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간 사형제에 대한 헌법소원은 수차례 제기됐지만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선고에까지 이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5 대 4의 근소한 차이로 사형제에 대해 합헌 결정이 이뤄지긴 했지만, 사형제에 대한 첫 합헌 판단이 이뤄진 1996년에 비해 위헌 의견이 늘어난 것은 되새겨볼 부분이다. 재판관 5명이 낸 합헌 의견은 사형이 헌법상 보장된 생명권을 박탈하는 것이지만 범죄예방 효과와 흉악범죄 피해자도 고려해야 한다는 여론 등 ‘현실론’을 반영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위헌 의견을 낸 4명에, 개선 필요성이 있다는 보충의견을 단 2명을 포함하면 어떤 식으로든 사형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재판관이 6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따라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현행 사형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사실상 인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 중에서도 민형기·송두환 재판관은 “사형제를 합헌으로 보되 제도 개선이나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보충의견을 제시해 사실상 국회를 향해 법 개정 요구를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민 재판관은 “사형 대상 범죄를 축소하거나 문제되는 법률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재판관도 “형벌 조항의 전면 재검토를 통해 사형이 적용되는 범죄의 범위를 축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21개 법률 110여 개 조문에서 사형을 법정형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형법 가운데 살인과 같은 흉악범죄를 규정한 7개 법률을 제외한 나머지 14개 법에서는 사형이 과잉형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합헌 의견이 극악범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에 해당되지 않는 범죄에도 사형이 규정돼 있다면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더디지만 꾸준히 이어져온 우리 사회의 사형제에 대한 인식 변화에 따라 재판관들도 사형제도가 지닌 문제점을 예전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헌을 주장한 재판관들도 가석방이나 사면 없는 ‘절대적 종신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폐지국’에 포함됐다는 국제인권단체의 기준을 제시하는 등 보다 다양한 논거 틀을 동원한 점 등은 과거에 비해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재판관들은 이번 판결에서 사형제 존폐 문제는 헌재의 심판을 구할 사안이 아니라 국회가 나서야 할 일이라는데 상당한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결국 입법부인 국회가 사형제 존폐 문제까지 다루는 법률 개정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앞으로 국회를 중심으로 대체 형벌제도 도입 등 다양한 입법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사형제를 둘러싼 논의의 종결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선을 촉구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헌재의 이번 결정을 전기로 사형제 폐지를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논의와 실천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사형폐지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가톨릭교회가 안팎으로부터 요청받게 될 역할과 몫도 덩달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명과 인권을 수호하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며 “우리 사회에 생명의 문화를 세워나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형제 폐지를 위해 더욱 힘을 모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천주교회 사형제 폐지 주요 활동 일지
1989. 2. 28. 서울 교정사목위, 사형제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
1992. 5. 22. 서울 교정사목위, 사형폐지 서명운동 시작
1992. 6. 6. 김수환 추기경, 결의문 ‘사형은 복음정신 위배’ 발표
1996. 12. 3. 대구대교구 사목국, 헌법재판소의 사형제도 합헌 판결에 대한 반박 성명서 발표
2000. 12. 10.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 구성 합의
2001. 5. 23. 주교회의 정평위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출범
2001. 6. 2. 주교회의 정평위, 국회에서 처음으로 사형폐지를 위한 6대 종단 연합 행사 개최
2004. 11. 22. 국회에서 사형폐지·종신형 입법화를 위한 결의대회
2006. 11. 23. 서울 교정사목위, 피해자가족 자조모임 ‘해밀’ 시작
2008. 10. 13~11. 14. 사형폐지소위, 생명 단편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2009. 10. 8. 주교회의 사폐위, 정진석 추기경 등 신자 10만481명 서명한 사형제 폐지를 위한 입법청원서 국회에 제출
2009. 10. 26. 타 종단과 함께 정부와 국회에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는 공동성명 발표
2009. 12. 30.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사실상 사형폐지국가’ 2주년 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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