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빛을 발하는 철쭉 한 아름이 김옥균 주교를 배웅하고 있었다. 생전에 서울 혜화동 성의교정 내 지혜관 뜰에서 정성을 다해 키우던 꽃이었다. 올해 첫 망울을 터트린 꽃을 허근 신부(서울대교구 단중독사목위원장)가 꺾어 봉분이 세워진 김옥균 주교의 묘 앞에 선물했다.
김옥균 주교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의 꿈을 키워온 고향, 용인에 위치한 성직자묘역에 3월 3일 안장됐다. 노기남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와 나란히 자리 잡았다. 묘소 앞에는 조만간 김 주교의 사목표어 ‘이 땅에 빛을’(LUCEM IN HANC TERRAM)이 새겨진 묘비가 들어설 예정이다.
○…장례 일정은 고인의 바람대로 간소하고 짧은 3일장으로 진행됐다. 장례미사 중 사제단을 대표해 추모글을 전한 교구 사목국장 민병덕 신부는 “김 주교님은 한국교회와 서울대교구 격동의 시절에 3명의 교구장님을 연달아 모시면서 교구장님의 손이 미처 닿기 어려운 교구 안팎의 일들을 살피고, 후배 사제들의 삶을 돌보며 교구 전체를 품고 사셨던 분”이라며 “이제는 빛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고 편히 쉬시길 빈다”고 밝혔다.
5일 용인 성직자묘역에서 추도미사를 주례한 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는 “김 주교님은 어렸을 때부터 사제의 꿈을 키워왔던 고향인 이곳 경기도 용인에 머물게 됐다”며 “선종하기 직전 병문안을 위해 찾았을 때도 오히려 교구를 위해 기도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헌신적인 자세를 보여주신 주교님은 이제는 하느님 품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실 것”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5년여에 걸친 입원과 퇴원의 반복에 이어 선종 이후에도 김 주교의 곁을 끝까지 떠나지 못한 이들은 유족들이었다.
장례 일정 내내 슬픔을 가누지 못했던 김 주교의 조카 김정직 신부(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는 “주교님은 내가 흠없는 사제로 살기 바라셔서 언제나 엄격하셨는데, 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들곤 했던 나의 부족함 때문에 더욱 서럽다”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김 신부는 “주교님은 생전에 차 한 대 사는 것도,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도 모두 못하게 간섭을 하셔서 동기 신부들이 해외에 나갈 때 동행 한 번 못한 것을 원망만 했었다”며 “뒤늦게 해외성지순례를 허락하시고 내가 몸이 아프니 중형차도 사게 해주셨던 그 배려 깊은 마음에 감사할 뿐”이라고 밝혔다.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해 묘소를 찾은 김 주교의 셋째누나인 김정숙(마르티나) 여사도 “나보다 먼저 가셔서 안타까움 금할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는 때가 있으시니 모쪼록 하느님 곁에서 편히 쉬시길 빈다”고 전했다.
5일 추도미사에 참례한 임현희(골롬바)씨 등 옛 비서들도 한목소리로 “직원들이 보기에 주교님은 무섭고 까다로운 면도 있었지만 뛰어난 추진력과 카리스마는 누구보다 뛰어난 분”이었다며 고인의 생전 모습을 회고했다.
○…김 주교가 남긴 유품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방색 실 몇 올이었다.
6·25 한국전쟁 중 카투사로 복무하면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매다 남은 것이라고 한다. 김 주교의 비서였던 김정옥(젬마·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수녀는 “주교님이 생전에 아끼셨던 것은 묵주 말고는 없었고, 구두도 직원들이 꿰매다 드릴 정도로 물건을 자주 바꾸지 않는 분이셔서 소장품은 특별한 게 없다”고 전했다.
김 주교는 평소에도 ‘퍼주는 것’으로 유명한 사제로, 옷이든 구두든 선물을 받으면 곧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곤 했다고. 김 주교의 유품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정리하며 유산은 고인의 뜻에 따라 전액 노인 복지에 쓰일 계획이다.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설립자 오웅진 신부는 “김 주교님은 은퇴 후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생을 다 바치고 싶어 하셔서, 2001년 은퇴 전부터 2005년까지 서울 꽃동네 신내 노인요양원 명예원장으로 활동하셨다”며 “오는 5월 노인요양원 설립 10주년을 맞아 요양원 내에 주교님의 흉상을 마련해 노인복지에 끝까지 힘쓰셨던 고인의 뜻을 기릴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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