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제강점기. 양병묵 신부는 형을 대신해 강제 징용에 나섰다. ‘장남이 살아남아야한다’는 생각에 죽음의 길을 대신 걸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꿈이었다.
전임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양병묵 신부(교구 원로사목자)를 ‘한국판 콜베 신부’에 비교했다. 대가족을 둔 아버지를 대신해 죽음을 자처한 콜베 신부처럼 형을 대신해 나선 강제징용의 길은 형제간 사랑을 넘어선 것이라 했다.
▧ 노사제의 팔순 감사미사
3월 18일 오전 11시. 조원동주교좌성당(주임 이규철 신부)에서 양병묵 신부의 팔순 감사미사가 열렸다. 일제강점기 때 형을 대신해 징용 길에 나섰던 젊은이는 이제 남색 마고자를 곱게 입은 할아버지 사제가 돼 제대에 섰다.
팔순이라는 나이가 됐지만 ‘사제’가 되고 싶던 그의 꿈은 이루고도 남았다. 한국전쟁이 터졌던 그날, 신학생이었던 그는 너무도 소중한 신학교가 걱정이 돼 전장의 한가운데를 뚫고 달려가 신학교가 서있던 것을 확인했던 사람이었다.
1958년 그토록 원하던 사제품을 받은 양 신부는 갈전리, 남양, 중앙, 사강, 평택, 광명본당 주임으로 일하며 신자들을 사랑하고 교구를 위해 헌신했다. 그동안 정자동주교좌성당 등 하느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많은 애를 썼고, 여러 곳을 신축했다. 교구 사무처장과 관리국장 등을 역임하며 교구 행정의 틀도 놓았다. 절약정신을 실천하며 무엇이든 아끼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사제로 살던 52년이 지나갔고 팔순이 왔다.
팔순을 맞이한 양 신부는 파킨슨병이라는 무거운 병에도 불구하고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다. 때때로 힘에 부쳐 고개를 숙이기도 했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미사를 함께했고,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며 주님의 기도를 하기도 했다.
팔순 감사미사가 열린 조원동주교좌성당은 양 신부가 은퇴 전 주임으로 사목한 마지막 본당이었다. 신자들은 아직도 그때 그 듬직한 어깨로 버팀목이 돼준 주임신부를 잊지 못한다.
신자들은 양 신부를 위한 미사참례 8540번, 영성체 8540번, 묵주의 기도 10,259번, 희생 20,518번, 십자가의 길 10,250번, 사제를 위한 기도 15,259번 등을 영적예물로 기꺼이 봉헌했다. 손자 신부인 김종훈 신부(원삼본당 주임)는 북과 함께 양 신부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저희는 언제나 든든하다”며 “앞으로도 언제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사가 끝나고 입은 할아버지 사제의 남색 마고자가 곱다. 은색 머리카락으로 변했지만 흐뭇하게 웃고 있는 노사제의 모습은 존재만으로도 모두에게 ‘든든함’으로 다가온다.
그가 작지만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일일이 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죄송합니다. 남은 생 주님 뜻 따라 살 것입니다. 교형 자매들도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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