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추기경님 무슨 보속할 것이 그리도 많아서 이렇게 길게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나중에 저희 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려는 것입니까? 겁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지금 추기경님은 당신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통하여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으로 깜깜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추기경님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의 고별사 중)
한평생 착한 사제로 살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었던 고 김수환 추기경. 고독한 사제로 평생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던 그는 삶의 마지막 여정에도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았다.
기나긴 투병생활이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그는 2008년 9월 11일 강남성모병원(현 가톨릭대학교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극한의 고통 앞에서 그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한국 최초, 최연소 추기경 김수환, 가난한 이들의 벗 김수환 등,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랐지만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댈 수밖에 없는 또 한 명의 나약한 인간 김수환이었다.
2008년 10월 4일, 위기가 찾아왔다. 스스로 가래를 뱉지 못하는 상황에서 호흡곤란, 산소부족으로 의식을 잃은 것이다. 긴급조치로 다음날 새벽 의식을 회복했지만 이후 가래 뽑아내는 일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식사도 줄어들었고 밥을 먹게 되는 날이면 1시간 이상씩 시간이 걸렸다. 소화도 잘 되지 않아 배변 보는 일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어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키고 싶었던 일까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봐. 자네들에게 이런 모습까지 보이게 됐네. 나야말로 병마개도 못 따고 약도 혼자 못 먹는 나약한 사람일세. 정말 미안허이….”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어주는 것만 같아 마음 아파했다. 투병보다 더 힘든 것은 주변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의 십자가’였다.
갈수록 십자가의 무게는 더해왔다. 육체적, 정신적, 심적 고통이 깊어졌다.
가장 큰 고통은 ‘고독’이었다.
“고 신부. 고독해 보았는가.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그는 과거 한때 비서였던 고찬근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힘겨운 투병생활 중에서도 그를 웃게 만드는 일이 하나 있었다. 병원에서 생활하며 가장 바라왔던 소망. 매일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집, 혜화동 주교관에 가보는 일이었다. 그는 주치의가 올 때면 집에 언제 돌아갈 수 있냐고 해맑게 웃으며 묻곤 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의 기운이 완연해지면 화사한 꽃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소망을 뒤로한 채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극한의 육체적 고통에서도 그는 의연했다. 목숨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어떠한 의학적 행위를 거부한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도 십자가를 안고 하느님의 섭리에 순종했다.
2009년 2월 16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사제 김수환은 평생 양 어깨에 짊어지고 왔던 십자가를 내려놓는다. 입원한 지 159일만의 일이었다.
마지막 말로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를 남겼다.
그는 평생을 그래왔듯 마지막 가는 길에도 각막을 기증하며 이웃에게 새 생명을 전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장기기증, 나눔 문화 확산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영성은 부활해 우리 마음속에 끊이지 않는 영성의 강이 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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