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상욱이 왔어요.”
“어 그래. 우리 상욱이 왔니…, 추운데 어서 들어와.”
3월 24일 오후 4시 50분 서울 화곡본동 105-87번지 ‘효주 아녜스의 집’. 김영한(성요셉애덕수녀회) 수녀가 학교에서 돌아온 이상욱(영희 막델레나·경복비지니스고등학교 3년) 양의 언 손을 녹이려 두 손을 모아 잡았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왔니?”
“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다 왔어요. 하하하.” 이 양은 “늘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인 것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며 “평소에 사소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양은 ‘효주 아녜스의 집’에 산다. 효주 아녜스의 집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결손 가정 소녀들이 생활하는 생활 시설이다. 이 양은 중학교 2학년 때 이곳에 와 5년째 김 수녀와 함께 지내고 있다.
이 양의 부모는 초등학교 때 헤어졌다.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갈수록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더 이상 아이들을 키울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이 양과 둘째 상은이의 손을 잡고 김 수녀를 찾았다. 김 수녀는 “아버님께서는 아이를 키우지 못해 늘 마음 아파 하셨다”며 “올해 둘째 상은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소식도 들으셨지만 아이들을 위해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립지만 잘 참고 있어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이 양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끝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에 겪은 상처는 많이 아물었지만, 아버지는 늘 보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로사리오 기도 소리가 조용하던 효주 아녜스의 집에 울렸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또한 복되시나이다….”
매일 오후 5시만 되면 바치는 저녁기도 소리다. 어느새 이 양도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다. 5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기도였다. 이 양은 무릎을 꿇은 채 그렇게 1시간 동안 기도를 이어갔다.
“어른이 되어서 자립하면 아버지를 꼭 모시고 살 거예요. 지금은 떨어져 지내지만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살아갈 날이 오겠죠.”
저녁 기도를 마친 이 양이 해맑게 웃었다. 매일 화곡본동본당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이 양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매번 신앙의 힘으로 이겨 낸다”고 했다.
이 양의 성실한 모습에 어느새 김 수녀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김 수녀는 “신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에 늘 강조하고 있다”며 “신앙 교육이 밑바탕이 된 아이들은 과거의 상처를 잘 치유해 자신의 인생을 잘 개척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조금의 어려움에도 넘어지고 만다”고 했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각. 효주 아녜스의 집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밥 짓는 소리, 국 끓는 소리, 장난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여느 가정집에서의 행복한 저녁식사 풍경이었다. 합숙에 들어간 2명을 제외한 9명의 가족이 모였다. 이 양도 저녁식사를 차리고 있는 김 수녀를 도왔다. 김 수녀는 이 양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였고 때로는 선생님이었다.
가지런히 그릇에 담긴 김치를 보며 김 수녀가 말했다.
“누구 딸이 이렇게 예쁘게 김치를 썰었을까.”
작은 칭찬에 신난 이 양이 김 수녀를 살며시 안았다. 이 양은 “수녀님께 기본예절도 배우고 있다”며 “받은 사랑을 보답하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잘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식사를 마친 이 양이 공부방에서 책을 폈다. 고3 직업반인 이 양은 요즘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취득 준비에 한창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립을 해야 한다.
이 양이 그동안 그려왔던 꿈에 대해 말했다.
“제가 아직 어리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 꿈을 갖고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 결혼해서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것 등…, 평범하게 보일수록 더 소중한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저 같이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힘내라고 응원해 줄 거예요.”
상욱이가 곁에 있던 김 수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 효주 아녜스의 집
효주 아녜스의 집은 무의탁 또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결손가정의 소녀들을 양육 보호하고 자립을 도와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아동양육시설이다.
1986년 파 레몬드 신부에 의해 설립됐으며 1997년 6월부터 미리내 성요셉애덕수녀회에서 운영중이다. 현재 중학생 5명, 고등학생 3명, 사회인 1명, 지적장애인 1명 등 총 10명이 생활하고 있다.
※후원 문의 : 02-2604-5781
※후원계좌 : 170176-51-006127 농협 (예금주 : 효주 아녜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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