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고(故) 이중섭씨가 근대화가로서는 처음 지난 1월 문화관광부로부터 「이달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었고, 이를 기념해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2월 21일까지 한 달간 「이중섭 특별전」이 근래 보기 드분 성황 속에서 열렸다.
이중섭 화백이 말년에 가톨릭에 귀의할 뜻을 지닌 채 임종했다는 사실(본보 2월 14일자 15면 보도)이 달려지기 전, 전시장을 찾은 한 수녀는 너무나 쉽게 『그림에서 하느님이 보여요. 참 감동적인 전시회예요』라고 말했다.
많은 유작들이 그가 신앙에 뜻을 두었던 말년의 작품들이고 그 중에는 성당을 소재로 한 것도 있어 더욱 관심을 갖게 한다. 신앙을 염원하기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오랜 지기(知己) 구상(요한) 시인을 통해 화가 이중섭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부농의 막내로 태어나 5살때 부친을 여윈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 외가에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다녔고 당시 선구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 김병기(뒤에 화가가 됨)와 한 반이 되면서 각종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당시 한창 발굴 중이던 고구려 무덤 속에서 벽화를 보며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한다.
1931년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유화가 임용련-백남순 부부의 지도와 영향을 받으면서 그림공부를 하게 된다. 민족의식이 강렬했던 오산학교에서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작품에 있어 가장 주된 소재이자 민족의식을 담고 있는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1935년 일본 도쿄 데이도쿠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학교로 이적한다. 이때부터 한국 유학생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작품활동에 주력하는 이중섭은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첫 출품해 협회상과 함께 대호평을 받는다. 38년, 후에 부인이 된 일본여성 마사코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1939~40년 경 유학 중이던 구상 시인과 동경에서 만나게 되는데 시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일이었던가 봐요. 미사를 보고 고은사라는 다방에서 만나 내가 점심을 샀어요. 점심 후에 두 정거장쯤 가니 그의 하숙집이 있었는데 다다미 4장과 3장 크기의 방 두 개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다미 3장 크기의 방문을 열어보니 중섭이 그림이 방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도록 쌓여 있었어요. 밑그림도 있고 완성된 작품도 있고…. 참 어지간히도 그리는구나 싶었지요. 중섭이더러 「천재 천재」하는데 그냥 천재가 아니예요. 그만한 노력 없이는 지금같이 힘찬 선은 흉내도 못 내요』
지금이나 당시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꿈은 파리 유학이었나 보다. 이중섭은 어느 날 술을 한 잔하고 구상 시인에게『프랑스의 대가들하고 누가 많이 그렸나 가서 비교해 보면 안다』고 말하기도 해 자기 노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려튼 이 무협 그는 유학생들과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도쿄서 창립전을 갖는 등 서울과 일본을 오가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후 구상 시인과는 별다른 만남이 없었다가 1942년경 송도원 가는 길에 만나 『지난 번 점심을 얻어 먹어 미안하다』며 자리를 마련해 밤새워 술을 마시게 되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43년 서울 전시회에 왓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이중섭은 일제말기 혼란과 징병 문제 등으로 작품활동에 큰 지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45년 마사코(이남덕)가 현해탄을 건너와 결혼하고 해방을 맞아 서울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는 등 비교적 순탄하고 행복한 시기였다. 부인과 아이들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이중섭의 일화를 구상 시인은 이렇게 전한아. 『첫 아이는 미숙아였는지 1살도 채 안돼 죽었어요. 함께 장례 준비를 하고 슬픔을 달래려 술을 한 잔 했지요. 술김에 같이 잠들었는데 문득 깨어보니 중섭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즐겨 그리던 「동자(童子)」그림이었지요. 뭐냐고 물어보니, 「생각하니 오늘부터 아이가 외롭겠다 싶어…」라고 말하며 관 속에다 그림을 잔뜩 채워줬어요. 옛날 노리개 같은 골동품도 함께』
1946년 원산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한 이중섭은 소위 「응향(凝香) 필화사건」에 연루된다. 당시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잇던 구상 시인의 작품이 북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공상적·퇴폐적·반동적이라는 등의 구실로 핍박받는 사건이었다. 이중섭은 응향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는 죄명이다. 구상 시인은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탈출을 성공했지만 이중섭은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과 문초를 받게 된다. 게다가 부인이 일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면서 작품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술 마시는 횟수가 늘며 주정도 부리기 시작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한 이중섭은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막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간다.
이듬해 제주도 서귀포에 정착하게 되고 52년에는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한다. 살기가 어려워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림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53·54년 통영 진주 등을 전전하며 가족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일념으로 그림 작업에 열중한다.
1955년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련하지만 은박지에 그린 그림들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고, 그림값을 떼이는 수난도 겪는다. 아직까지 그의 작품을 받아들일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중섭은 저녁마다 술로 지내고 자학에 빠져들게 된다. 보다못한 구상 시인은 그를 대구로 불러 집에서 같이 살거나 여관방을 마련해 작업에 전염하게 하고 그해 5월 대구에 있는 미국 공보원에서의 개인전을 주선해 준다. 이 당시 나온 그림이 「구상네 가족」, 「복숭아와 아이」, 왜관성당을 그린 「성당 부근」등이다.
「구상네 가족」은 단란한 구상 시인의 가족을 바라보는 자신을 함께 그림으로써 일본에 있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복숭아와 아이들」은 구상 시인이 각혈을 해서 입원하고 있을 때 찾아와 내민 그림. 『뭐냐』고 묻자 『그 왜 어떤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그걸 먹고 우리 상(常)이 어서 나으라고…』라며 순하고 순한 표정을 보였다는 것. 구상 시인은 이중섭을 회고할 때면 그 때 그 천도복숭아 때문에 이렇게 오래 살고 있다는 것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아무튼 대구서의 개인전도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이중섭은 또 한번의 충격과 영양부족, 신경쇠약, 거식증 같은 증세를 보여 구상 시인은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이후 종군화가 신분으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성베드로병원(신경정신과)으로 옮겨 완치됐다. 구상 시인은 서울로 올라와 회복 축하연까지 열어줬다. 그러나 너무 방심해서일까? 56년 어느 날 외출해 너무 과음한 나머지 다시 음식을 거절하며 거식증 증세를 보여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구상 시인이 다시 올라와 정신병원에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서대문 적십자병원 1등실로 옮겨주고 대구로 내려갔다.
여기서도 회복기미를 보이다 어느날 갑자기 임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는 구상 시인은 지금도 당시 임종을 지켜보지 못해 애석해 하고 있다. 정훈교육 때문에 일선에 나가 있던 구상 시인은 임종 다음날에야 연락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길로 올라와 시신을 화장하고 유해의 반은 망우리에 묻고 반은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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