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정이었다. 20세기 이후 최대의 지진 참사로 고통 받고 있는 아이티(HAITI)로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뉴욕 JFK공항까지 14시간, 환승 대기 11시간을 기다린 끝에 아이티 수도이자 최대 피해 지역인 포르토프랭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JFK공항에서 함께 탑승을 기다리던 아이티인들의 슬퍼 보이는 눈에서 대지진의 참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적십자 등 구호단체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승객들의 대부분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을 잃은 아이티인들이었다.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가난 때문에 타향에서 애타게 발만 구르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혼자 들기에 버거워 보이는 큰 가방 2~3개를 챙겨 조심스럽게 비행기에 실고 있었다.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내 고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귀향한다는 설렘보다는 힘겨워하는 가족들을 하루빨리 돌봐야한다는 의무감에 비장함마저 묻어났다.
1년여 만에 고향인 델마(DELMAS)를 찾아간다는 페드로 루이 쥐르스(Fedro louis jeurce·29) 씨도 지난 1월 대지진으로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지진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돈을 마련하지 못해 지금에서야 찾아뵙는 길”이라며 “누나와 형은 다행히 살았지만 이재민 임시 캠프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가방에는 음식, 옷 등의 생필품과 환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빛바랜 사진, 미국에서 열심히 일해 벌었다는 손때 묻은 돈이 들어 있었다. 4시간여 만에 고향이 눈앞에 펼쳐지자 아이티인들은 급한 마음에 비행기의 좁은 창문으로 서로 고개를 내밀기 바빴다.
‘내가 벌어온 돈으로 가족들이 난민촌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불구가 된 내 아이도 밝게 웃으며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을거야.’
지진 이후 한없는 슬픔과 걱정으로 살아온 아이티인들이 굳은 결심과 희망을 품은 채 눈앞에 펼쳐진 포르토프랭스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절망과 눈물의 땅, 산사람은 살아야한다.
한국에서 출발한지 29시간 만에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공항에 도착했다. 지진으로 무너진 공항의 모습은 대지진의 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너진 공항은 아직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시설도 곳곳에 금이 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인근의 창고를 개조한 새 공항이 문을 열었지만 임시 입국 심사대만 운영될 뿐이었다. 입국 심사대에서는 서로 목청을 높이고 있는 아이티인들이 얽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지진이 발생한지 어느덧 4개월째를 맞았지만 아이티는 여전히 무질서한 모습이었다.
“택시. 택시.” “핸드폰. 1달러.”
공항을 나서자 100여 명이 넘는 아이티인들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대신 들어주겠다며 억지로 짐을 뺏기도 했고, 10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기도 했다. 대부분 돈을 벌고자 모여든 젊은이들이었다.
삶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린 지진의 충격으로 무기력해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공항 앞 공터에 모여 있던 아이티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생필품 등을 팔고 있었지만 찾는 이도 거의 없어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월 12일 오후 4시53분, 35초간 지속됐던 대지진. 23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날의 끔찍한 기억은 어느새 괴물로 변해 아직까지 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델마 지역의 아이티 카리타스로 향하는 길. 대지진의 최대 피해지역인 포르토프랭스는 처참했던 그날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진으로 한꺼번에 주저앉은 건물은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고, 반파됐거나 금이 간 건물도 눈에 많이 띄었다.
그동안 시신을 수거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던 아이티인들도 이제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건물 사이로 무표정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지진으로 무너진 집과 건물은 어느덧 아이티인들의 삶의 터전이자 일터가 됐다. 건물 잔해 속을 뒤져가며 이미 삭아 버렸을 자재를 챙기는 이들의 모습에는 삶의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집 앞과 거리는 시장으로 변해 있었다. 지진 이후 생긴 진풍경이었다. 물가가 너무 비싸 당장 먹고 살기 힘들었지만 무너진 건물에서 어렵사리 구한 물품을 되팔기도 했다. 담장의 철조망에 제멋대로 걸려 있는 옷들도 보였고 어렵게 배급 받았던 빵도 선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티 물가는 이웃나라인 도미니카공화국보다 3배 이상 높은 상황이었다.
건물 잔해들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도로와 인도에는 하루가 다르게 잔해로 쌓여 도로가 막히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잔해를 치운 곳에 누군가가 다시 잔해를 쌓아 놓았고 금이 가 있던 건물은 여진으로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몰랐다.
대지진과 여진의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티인들은 집 앞에 텐트를 치고 삶을 이어갔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은 아이티 북부 지역으로 이주했거나 포르토프랭스 근처 임시 캠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티 카리타스에 따르면 지진으로 포르토프랭스에는 25만 개의 집이 무너져 46만 8천7백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했다. 특히 집을 잃은 46만여 명의 이재민들은 포르토프랭스 인근의 315개의 임시캠프의 열악한 환경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티 카리타스에 도착하고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 델마 33번지의 한 임시 캠프로 발길을 옮겼다. 캠프에서 도착하자 임시 거주자들이 몰려들어 간절하게 호소했다.
“요즘에는 음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어요. 물도 부족합니다. 화장실도 씻을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비가 내리면 천막은 물이 새고 임시캠프는 정말 끔찍하게 변할 거예요.”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했다.
아이티 후원 계좌
454-005324-13-045 우리은행
예금주 : (재)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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