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재 제1대 원장 신부와 당시 성라자로마을의 생활자들.
1950년 광명리(현 광명시) 신기촌에 처음 뿌려진 사랑의 씨앗은 60년의 세월을 거치며 국내외 한센인들을 아우르는 큰 나무로 자랐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온 성라자로 마을의 60년간의 나이테를 따라가 본다.
일제치하 한센병 환우들의 삶은 참담했다. 대부분 소록도에 강제 수용됐다. 소록도가 아니면 으슥한 공동묘지, 강가의 다리 밑이 그들이 갈 수 있는 전부였다. 따가운 시선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특별한 치료나 돌봄 없이 거리를 배회해야 했다.
그러던 이들에게 자신들만의 공동체가 생겼다. 1950년 6월 2일, 당시 가톨릭구제회(NCWC)와 미국 종교단체구제사업협회(LARA)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던 죠지 캐롤 안(George M Carroll 安,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는 수십여 명의 한센병 환우를 이끌고 광명리 신기촌에 정착촌을 마련했다.
새 보금자리의 이름은 ‘성라자로요양원’.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연명하다 끝내 아브라함 품에 안긴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이렇게 성라자로마을의 초석이 놓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마을 설립 20여 일 만에 전쟁이 발발했다. 원생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도움 줄 곳이 없었다. 원생들은 제 갈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흩어졌다 만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앙의 불씨는 살아있었다. 1950년 12월 23일, 성탄대축일을 앞두고 첫 세례식이 열렸다. 27명의 원생들이 신앙 안에 새 삶을 시작했다.
전쟁은 계속 엎치락뒤치락했다. 원생들은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유랑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는 가운데 요양원을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가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원생들은 다시금 캐롤 몬시뇰(1950년 11월 20일자로 평양교구장 서리 임명 후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을 찾아갔다.
▲ 성라자로마을 아래쪽에 있던 뜨내기 한센인들의 마을.
이후 요양원이 알려지면서 처음 70여 명이 102명까지 불어났다. 원생들은 정부지원 양곡과 가톨릭구제회에서 주는 밀가루 등으로 겨우 식생활을 이어갔다.
치료도 큰 문제였다. 새 정착촌에는 병원은 고사하고 외부에서 찾아오는 의사도 없었다. 과거 소록도에서 한센병 의학강습을 받은 원생들이 기초적인 치료와 간단한 수술, 약 배급 등을 맡은 것이 전부였다.
상주하는 사제도 없이 캐롤 몬시뇰이 업무 차 올 때만 주일미사를 집전했다. 후유증으로 오그라든 손을 모으고 합장하는 모습은 어설펐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후에는 수원본당 임시보좌로 부임한 이경재 신부를 초청해 판공성사를 받았다.
원생들과 이 신부의 역사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훗날 이 신부는 제1대 원장신부로서 평생동안 원생들의 영육간의 건강과 함께한다.
이 신부는 사제관이 여의치 않아 의무실 내 큰방을 쓰면서 원생들과 동고동락했다. 이 신부 부임 후 가정사를 짓고 잉여 자재로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는 등 건물들을 늘렸다. 원생들을 위한 정착촌이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 신부는 또 원생들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삶의 의욕을 잃고 무위도식하는 원생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가장 필요한 것은 치료였다. 환우들은 물론 미감아들(未感兒, 한센환우들의 자녀로 감염되지 않은 아이)의 교육에도 품이 많이 들였다. 이러한 일들은 역대 원장 신부들도 마찬가지였다.
▲ 현재 성라자로마을에 서 있는 창설자 죠지 캐롤 안 주교(왼쪽)와 이경재 신부(오른쪽)의 흉상.
이에 따라 제7대 원장으로 재부임한 이 신부는 성라자로 요양원의 변화를 꾀했다. 마을 내부 운영의 활성화뿐만 아니라 구라(救癩)사업을 국외까지 넓혀간 것. 재미동포를 통한 후원회 결성과 해외원조, 기부금 모금 등이 그것이었다. 성라자로마을은 국내 환우들에 머물지 않고 해외 여러 나라에서 열악한 환경과 신체적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한센 환우를 찾아 지원을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라자로돕기회’가 발족했다.
성라자로마을은 해마다 후원 회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국내외 한센환우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라자로의 날’과 ‘그대 있음에’ 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그대 있음에’ 음악회는 유럽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특히 오는 6월 5일(오후 3시)에는 설립 60주년을 맞아 제28회 ‘그대 있음에’ 음악회가 실시된다. 이 음악회의 수익금은 동남아, 아프리카 등 오지에서 고통 받는 한센인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 인터뷰 / 조욱현 성라자로마을 원장 신부
“나눔 앞장서는 공동체로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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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욱현 성 라자로마을 원장 신부
조욱현 성라자로마을 원장 신부는 “60돌을 맞은 성라자로마을은 국내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거쳐오면서 한센인이라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을 실천한 시발점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성라자로마을 설립 이후 한국교회도 한센인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이들을 위한 나눔 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1968년 1월 28일 세계나병의날에 발맞춰 첫 번째 구라주일을 제정하는 등 한센인들을 위한 사목 방향을 마련했습니다.”
60년 간 한센인들의 정착 공동체로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성라자로마을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를 겪었다. 외부에서 도움을 받던 성라자로마을은 이제 해외 한센인들을 위한 중심 허브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1990년부터(설립 40주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자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후 중국, 소련(러시아),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등 각 나라를 직접 다니거나 (교황)대사관을 통해 나눔을 실천해왔습니다.”
아울러 성라자로마을은 한센환우뿐만 아니라 은퇴사제들을 위한 사제마을을 조성, 신앙마을로 거듭났다. 현재는 지형적 조건에 의해 활성화 되지 못했지만 몇 년 내에 실버 홈을 만들 계획이다.
“이경재 신부님께서 세우셨던 뜻을 잘 이어가기 위해 실버 홈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마을 전체를 복지단지화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