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저는 내 아기의 눈동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유. 그래서유 그애가 어느 탁아소에 가 잇든지 꼭 찾을 거예유. 전 그 애만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살 것이구만유』
속이고 배신한 남자의 씨를 출산한 어느 가련한 산모의 이야기다. 그녀는 청주에서 무남독녀인 어머니의 무남독녀로 자라나, 어머니마저 여의고 나서 만난 남자의 아기를 안고 찾아가 보니 이미 자녀가 넷이나 있더라는 것이다.
원망의 쓰라림마저 뒤로 하고 무작정 상경한 그 모녀는 추운 겨울 길에서 리어카 행상을 하다가 쓰러져서 산모는 경찰차에 실려서 영등포 시립영원의 무료 병동으로 3개월 된 아기는 어느 탁아소에 맡겨졌다.
나는 삼대째 무남독녀의 기구한 운명을 지닌 그 자매의 눈에서 희망의 빛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그녀에게서 오히려 아름답고 착한 모정과 확신에 찬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거의 20년 전에 우연히 만났던 그 산모가 왜 그렇게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까? 하고 다시 생각해본다.
그토록 절망적이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꽉 잡고 확신에 차 있던 산모의 태도 속에서 나는 마리아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자 없이 처녀가 임신했다면 누가 믿어줄 것이며 잉태된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정신이 돌았다고 말하기 십상이 아닌가? 마리아님의 마음 고생 또한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언니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를 받고 화답하는 노래는 오히려 기쁨과 희망을 잉태한 찬미의 노래가 아닌가?
마리아님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늘이 점지하고 계획한 구원 사업을 깨닫는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 면면히 흐르는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의 희망을 마리아님의 태중(피와 살)에서 살아나게 하는 말씀의 잉태이다. 말씀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님은 하늘(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딸이 하늘을 잉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면 어떻게 시골의 평범한 처녀가 그토록 엄청난 깨우침에 도달했으며, 하늘(하느님)을 잉태해야 하는 소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이것은 요즈음 우리들의 시각과 사고방식만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질중심주의,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된 우리들 마음의 눈은 겉모습만을 보려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몸(겉)을 비싼 장신구와 의복 또는 화장으로 꾸미려 한다. 이렇게 외모를 필요 이상으로 꾸미려 하는 것은 결국 속마음이 공허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속마음을 채워줄 수 잇는 것은 돈, 명예, 권력, 쾌락이 아니라 겸손, 온유, 믿음, 희망, 사랑 등이다. 겉보기에 아무 의지할 데 없이 가련하게 영등포 시립병원에 누워 있던 그 산모는 오히려 아기를 만날 기쁨과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리아님 역시도 겉모습은 비천하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우며 가련한 여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인류의 새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 즉 하늘(하느님)과 땅(사랑)이 결합하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봉헌한 것이다.
우리도 이제 겉만 보고 사람과 매사를 판별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마리아님의 신앙의 눈으로 거듭나야겠다.
두 발은 굳세게 땅을 딛고 두눈은 하늘로 향하자.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서웅범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부터는 예수회 변희선 신부(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님이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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